[탁구]녹색테이블 떠난 탁구스타 유지혜

  • 입력 2003년 6월 15일 17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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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여왕’에서 대학원생으로 변신한 유지혜. 고려대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있는 그의 모습이 선수로 뛸 때와는 너무 달라보인다. 이훈구기자
‘탁구여왕’에서 대학원생으로 변신한 유지혜. 고려대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있는 그의 모습이 선수로 뛸 때와는 너무 달라보인다. 이훈구기자
스포츠 기자의 즐거움 중 하나는 스타 선수들을 경기장 밖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점. 유니폼 대신 사복으로 갈아입은 선수를 체육관 아닌 밖에서 만나면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훨씬 활기찬 것같기도 하고.

90년대 중반 이후 ‘탁구여왕’으로 활약해온 유지혜. 고려대 안암캠퍼스 정문 앞에서 만난 유지혜도 경기장에서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긴 생머리에 흰 블라우스, 책과 노트를 가슴에 안은 채 가볍게 목례를 하는 그는 멋쟁이 여학생 그대로였다.

그는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27세. 여자선수치고는 나이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불과 8개월 전 열렸던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따냈던 그다. 그런데도 갑자기 은퇴를 선언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집이라도 가려는 것일까.

“재작년 프랑스 몽펠리에팀에 임대선수로 가면서 귀국하면 은퇴해 대학원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갑작스런 은퇴가 아닙니다. 몇 년 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을 실행에 옮긴 것뿐이예요.”

유지혜가 라켓을 놓기로 한 이유는 박사학위를 따 교단에 서고싶은 단 한 가지. “사귀는 애인도 없고 결혼은 생각도 않고 있다”며 깔깔 웃는다.

지난 3월 1년6개월여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고려대 대학원 체육교육과 석사과정에 입학, 매주 3일 체육관 대신 강의실을 찾는다. 고향이 부산인 유지혜는 아예 대학 앞 오피스텔에 방 한 칸을 마련했다. 학교에 오가는 시간까지 아까워서다. 요즘 그는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산다.

유지혜는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여자탁구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왼쪽부터 지난해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유승민과 짝을 이룬 혼합복식에서 은메달을 따낸 뒤 환호하는 유지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모습, 공격을 성공시킨 뒤 왼손을 불끈 쥐며 기합을 넣는 모습, 그리고 상대 서브를 받아내기 위해 공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제일 흥미있는 과목은 스포츠 심리학입니다. 이 분야를 전공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는 하지만 부산 성지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라켓을 잡은 뒤 15년 넘게 해온 탁구다. 하루아침에 그만 두었는데 조금은 서운하지 않을까.

“전혀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그러나 새 출발을 했고 공부하기가 너무 바빠서 서운한 생각이 들 틈이 없습니다.”

프랑에서의 생활은 탁구에만 매달려온 그를 바꿔 놓았다. 국내에서 선수생활을 할 때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훈련하고 경기에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지만 프랑스에서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

“가장 큰 수확은 프랑스어를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을 만큼 익혔다는 점입니다. 국내에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래요. 그래서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볼 작정이예요. 요리도 배웠어요. 프랑스 요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잖아요. 또 여성으로 갖춰야할 기본적인 것도 혼자 익혔습니다. 그렇다고 신부수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계랭킹 3위까지 올랐고 97년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현정화를 이어 ‘탁구여왕’으로 군림해온 유지혜. 선수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일까.

“영광의 순간보다는 정상 일보직전에서 물러났을 때가 더 생생하다”는 그는 99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식 준결승에서 중국의 왕난에게 마지막 5세트에서 9-4로 앞서고 있다가 역전패 당한 것, 2000년 시드니올림픽 여자복식 준결승에서 역시 중국의 왕난-리쥬조에게 듀스 접전을 펼치다 진 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1남1녀의 막내인 유지혜는 “선수생활 동안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저를 아끼고 도와줘서 행복한 선수 생활을 해온 것 같다”고 말했다.

팬 중에는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그를 괴롭힌 이도 있었다. 또 국제대회에 자주 출전하다 보니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외국선수도 꽤 있었다.

“가끔은 ‘남자친구가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무엇보다 자상하고 착한 남자가 좋습니다. 그렇지만 당장은 아니예요. 새롭게 시작한 공부가 너무 재미있거든요.”

그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탁구를 시작했다. 라켓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 유지혜는 어떤 모습일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잘 쳤습니다. 지금도 음악을 들으면서 요리하는 게 취미일 정도이니까요. 탁구를 안했으면 아마 피아니스트가 돼 있었을 겁니다.”

“오늘까지 레포트를 내야한다”며 총총히 돌아서는 유지혜에게선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

권순일기자 stt77@donga.com

●유지혜는 누구.

△생년월일=1976년 2월10일

△출생지=안동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람.

△가족관계=부(유동길),모(박분금),

1남1녀중 막내.

△체격=1m63, 57kg

△학력=부산 동광초-부산 선화여중-부산

선화여상-서울산업대

△경력=삼성생명(1994)-삼성카드(2002)

△포상=1997년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상

△주요 국제경기실적=94히로시마아시아

경기 복식 3위/95세계탁구선수권대회

혼복 3위/96애틀랜타올림픽 복식 3위/

98방콕아시아경기 복식 3위/98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 복식 1위, 혼복 2위/

2000시드니올림픽 복식 3위/

2002프로투어그랜드파이널 복식 1위/

2002이탈리아오픈 복식 1위/

2002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단식 3위,

복식 3위, 혼복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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