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신뢰경영]<11>美기업 "뇌물은 공공의 적" 전쟁 선포

  • 입력 2003년 6월 15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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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하는 일을 보고 있다’는 의미일까. 월마트의 납품업체 직원 면담 사무실에는 창립자인 샘 월튼의 사진과‘선물수수 금지’를 경고하는 게시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벤턴빌=공종식기자
‘나는 네가 하는 일을 보고 있다’는 의미일까. 월마트의 납품업체 직원 면담 사무실에는 창립자인 샘 월튼의 사진과‘선물수수 금지’를 경고하는 게시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벤턴빌=공종식기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거래는? 흔히 매춘(賣春)이 정답이라 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오래된 거래는 뭘까. 많은 사람들은 ‘뇌물’을 든다. 그 만큼 부패(腐敗)는 뿌리가 깊고,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으며, 따라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뇌물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다국적 기업 중에서 부패문제에 대해 매우 엄격한 기업으로 손꼽히는 미국의 모토로라를 방문했다. 일찌감치 중국에서 교두보를 구축한 것이 경쟁력이다. 시카고 본사에서 브루스 라모 윤리담당 부사장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중국에서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고 제대로 사업할 수 있나요?”

라모 부사장은 “몇 년 전 중국 지사 직원들에게 사내행동강령에 대해 교육을 하는데 이런 질문이 나왔다”고 회고했다.

‘중국은 미국과 다르다. 행동강령대로 했다가는 계약을 경쟁사에 뺏길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라모 부사장의 답변. “뇌물제공을 금지하는 행동강령은 똑같이 적용된다. 대신 무조건 ‘노(No)’ 하지 말고 ‘창조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실제로 모토로라는 중국의 한 도시에서 공장 가동을 앞두고 소방공무원들이 대가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다. 대신 소방공무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을 제공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 중국 공무원들은 오히려 모토로라의 이같은 결정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갈수록 엄격해지는 다국적기업들=오티스 엘리베이터로 유명한 미국의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사는 얼마 전 외국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한 해외 지사장을 해고했다. IBM 본사는 아르헨티나 은행 간부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IBM 아르헨티나 지사를 자체 적발해 사법당국에 고발하기도 했다.

모토로라도 인도에서 공장을 설립하면서 담당 공무원들이 금품을 요구하면서 전기를 공급해주지 않자 공장 가동을 연기하면서까지 버텼다. 이후 모토로라는 인도 공무원들 사이에 ‘요구해도 안 주는 회사’로 낙인 찍혀 시달림을 받지 않게 됐다.

이처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몸을 사리는 것은 외국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다 적발되면 형사처벌을 받도록 돼 있는 미 국내법 때문이다. 여기에 90년대 중반 이후 주요 기업들을 중심으로 윤리경영 바람이 불면서 이 같은 뇌물추방 관행은 더욱 엄격해지고 있다.

또 주요 기업들을 중심으로 핫라인을 개설해 놓고 회사차원에서 뇌물제공이나 수수 등에 대해 신고를 받고 있는 것도 부패 정도를 줄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감시의 눈’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예방의 방법들=세계 최대의 소매유통업체인 월마트. 미국 아칸소주 벤턴빌에 있는 본사에는 월마트 구매담당자가 납품회사 직원과 만나는 면담실이 50여개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사무실마다 회사 창립자인 샘 월튼의 사진과 함께 ‘우리는 납품업체로부터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커다란 게시판이 걸려있다는 점. 마치 월튼이 바로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보담당자인 애미 와이어트는 “납품업체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향응을 받을 경우 제품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져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적어진다”고 설명했다.

모토로라는 1400명에 이르는 매니저급 직원들에게 매년 6시간씩 모토로라 직원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원칙에 대해 교육한다. 최고경영자(CEO)가 참석한 가운데 분기별로 열리는 윤리위원회에서는 몇 시간씩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토로라가 진출한 전세계 모든 국가에서도 분기마다 별도의 윤리위원회를 개최한다.

또 모토로라 직원들은 입사하면 모토로라의 직원행동강령에 서명해야 한다. 서명을 한 뒤에도 고가의 뇌물을 받거나 주다 적발되면 퇴사를 감수해야 한다. 라모 부사장은 “아무리 교육을 철저히 해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며 “위반 정도가 심하면 사법당국에 직접 고발한다”고 전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직원행동강령을 채택한 회사들이 적었으나 9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이를 채택한 회사들이 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0년 전까지만 해도 모토로라를 포함해 7명 밖에 없었던 회사내 윤리담당간부가 지금은 1000명을 넘고 있다.

시카고·벤턴빌(미국)=공종식 기자 kong@donga.com

▼부패라운드 현황 ▼

지난달 서울에서 123개 정부의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3차 반부패세계포럼에서 반부패에 대한 국제연대를 촉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사진제공 법무부

국제사회가 협력해서 부패를 차단하려는 부패라운드의 출발점은 1977년 제정된 미국의 ‘해외부패 관행법’이었다. 이 법은 해외 공무원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미국 기업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는 최근까지 이런 법이 없었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은 오히려 해외 뇌물제공에 대해 세금공제 혜택까지 주기도 했다. 그러자 미국 기업들이 “외국기업과 공정경쟁을 할 수 없다”고 발끈하면서 미국 정부에 대책을 요구했다.

미 상무부는 “97년 한해 동안에만 외국 경쟁사의 뇌물 제공으로 미국 회사가 150억달러에 이르는 국제 입찰을 수주하는 데 실패했다”는 자료를 내놓기도 했다.

결국 미국정부의 주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국제상거래에 있어서 외국공무원에 대한 뇌물방지협약’을 제정했고, 1999년 2월부터 이 협약이 발효되면서 부패라운드는 급물살을 탔다. 협약 비준 국가들은 협약 발효에 맞춰 국내법을 대거 손질했다. 한국도 98년 12월 국회에서 '외국공무원에 대한 뇌물방지법‘을 제정해 통과시켰다. 한국민이 외국에서 뇌물을 주다가는 국내법으로 처벌받는 것이다.

이후 부패라운드는 점차 국제상거래의 문제를 넘어서 국제정치적인 쟁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제 부패라운드는 OECD만의 의제가 아니다. 세계은행은 차관제공을 조건으로 해당 국가의 부패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제3차 반부패세계포럼에는 123개 국가로부터 정부 관료와 전문가들이 참석해 부패 추방에서 공동전선을 구축하자는 선언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패라운드는 아직 실천력을 담보 받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미국의 경우 해외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업인들을 기소하는 것은 매년 한두 건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도 지난해 처음으로 ‘외국공무원 뇌물방지법’을 적용해 미군 장교에게 뇌물을 준 건설업자를 기소한 것이 실적의 전부다. 아직도 국제간 사법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아 해외뇌물을 수사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대부분의 국가가 해외 뇌물 수사 사건에는 소극적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라운드가 좀 더 강력해질 것이라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특히 유엔 주도로 추진 중인 ‘반부패 협약’이 다음달 통과돼 비준국가가 올해 안으로 150여개에 이르면 그동안 선진국 중심으로 이뤄졌던 반부패 연대의 외연이 대폭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조만간 국가의 투명성이 중요한 ‘국가 경쟁력’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뇌물은 기업 비용상승 직결 ▼

부패 문제에 대해 사회의 관심이 커지고 있으니까 가까운 장래에 부패가 큰 폭으로 줄어들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뇌물을 주고받는 것은 개별 기업의 입장에서 ‘뇌물 수수로 얻는 이익’이 비용, 즉 ‘적발될 확률×적발됐을 때의 타격’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게임이론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

중요한 계약을 놓고 A, B 두 기업이 경쟁한다고 하자. A사는 B사가 뇌물을 줄지 안 줄지 모른다. 만약 B가 뇌물전략을 쓴다면 A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또 B가 뇌물을 안 주고 A만 뇌물전략을 쓴다면 A는 매우 유리해진다.

즉 B가 어떤 선택을 하든 A사는 뇌물전략을 쓰는 것이 유리하다. 이를 ‘절대우위 전략’이라 한다. 반대로 부패 사슬에서 먼저 벗어나는 기업에는 ‘선 이탈 불이익’(first mover disadvantage)이 발생한다. 이렇게 될 경우 경쟁력 있는 기업이 아니라 뇌물 기업이 살아남기 때문에 경제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하나 더 있다. 모든 경쟁자가 뇌물전략에 기대면 전체 기업에 비용상승을 가져온다. 축구경기 관람석에서 나 혼자 일어서서 보면 잘 보이지만, 모든 관중이 일어서면 다리만 아픈 것과 같다. 이처럼 개체로서는 유리한 선택일 수 있지만 모든 구성원이 같은 선택을 하면 전혀 엉뚱한 결과가 빚어지는 것을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라 한다. 미 하버드대 경제학과 상진 웨이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부패 정도가 싱가포르에서 멕시코 수준으로 악화될 경우 이는 기업에는 20%의 추가 세(稅)부담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올바로 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경제의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깨끗한 거래관행이 필요하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결론이다.

뇌물의 이 같은 성격 때문에 부패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관련 업계의 모든 기업들이 ‘집단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 정부의 선도역할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팀원=김용기 신연수 이강운 공종식 정미경 박중현 김두영

홍석민 기자(이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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