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미남배우 그레고리 펙 87세 타계

  • 입력 2003년 6월 13일 19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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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과 열연했던 미국의 미남배우 그레고리 펙이 12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7세.

펙의 대변인 먼로 프리드먼은 12일 “펙은 아내 베로니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12일 새벽 특별한 고통 없이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발표했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프랭크 시내트라의 딸 티나 시내트라, 영화 ‘투씨’의 시나리오를 쓴 래리 겔바트, 프랑스 영화배우 루이 주르당 등이 그의 집을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했다. ‘할리우드 스타의 거리’에 새겨진 그의 이름 위에는 팬들이 가져다 놓은 조화들이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펙은 성실하고 정이 많았으며 정직했다”며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스타’였고 그 별은 이제 하늘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가 이룩한 전설은 단지 영화 때문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도 매우 도덕적이고 위엄 있으며 고상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91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호야 태생의 펙은 여섯 살 때 부모가 이혼해 줄곧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약사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UC버클리 의대에 진학한 그는 연극에 심취해 대학 내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가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 연기학교에 입학, 전설적인 연기지도자 샌퍼드 마이스너와 세계적인 무용수 마사 그레이엄에게 수학했다. 그는 1942년 ‘더 모닝 스타(The Morning Star)’라는 연극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진출했다.

1944년 ‘영광의 날들(Days of Glory)’로 스크린에 데뷔한 그는 두번째 작품 ‘천국의 열쇠(The Keys of the Kingdom)’를 시작으로 ‘가장 특별한 선물(The Yearling·1947)’,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1947)’, ‘정오의 출격(Twelve O'clock High·1949)’,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 Bird·1962)’ 등 다섯 차례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63년 ‘앵무새 죽이기’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그는 지금까지 60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빅 컨트리(The Big Country)’ 등에서는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정의로운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최근 미국영화연구소가 영화 속 최고 영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역을 맡은 그는 이 캐릭터처럼 모범적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펙은 미국영화연구소 초대 의장, 미국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협회 회장, 미국 암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베트남전 당시에는 반전시위에 앞장섰고 말년엔 미국 각지를 돌며 자신의 삶에 대한 강연을 펼쳤다. 1967년에는 예술과학협회가 주는 진 허쇼트 인도주의상을, 1969년에는 대통령 자유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했다.

그는 유명세에 비해 사생활도 조용했다. 1942년 결혼한 그레타 라이스와 1955년 이혼했을 뿐 스캔들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는 1955년 기자 출신의 베로니크 파사니와 재혼해 여생을 함께했다. 펙은 전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았으나 TV기자였던 첫째아들 조너선은 1975년 자살했다. 베로니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앤서니와 시실리아는 모두 배우로 활약 중이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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