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칼럼]박 형사의 눈물

  • 입력 2003년 6월 13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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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은 박두만 형사(송강호)의 네모난 얼굴이 스크린 가득 채워지면서 막을 내린다. 뚫어지게 앞을 바라보는 박 형사의 눈가에는 어느새 물기가 배어 있다. 형사로서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지 못한 자책과 회한의 눈물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너무나 평범하고 뻔한’ 악(惡)의 실체를 응징하지 못하고 법과 정의가 한낱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린 현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경찰영화 ‘와일드 카드’는 항상 법과 제도보다 몇 걸음 앞서 도망가는 악의 무리를 끝내 척결함으로써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있다. 기세등등했던 조폭들은 이들 형사 앞에 순한 양이 되어 굽실거릴 뿐이다. 대한민국 경찰들이 영화 속 형사들만 같다면 세상은 훨씬 나아질 것 같다.

▼경찰영화가 뜨는 이유 ▼

경찰영화가 뜨고 있다. ‘살인의 추억’과 ‘와일드 카드’ 같은 최근 흥행작들은 경찰의 비리와 부패를 풍자한 이전 영화와는 다르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 법과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려는 사명감 넘친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흐름이 그 시대 사회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문화연구의 정설이다. 퇴폐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는 문화도 같은 경향을 띤다. 가난한 시절의 문화는 현실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를 담는 경우가 많다. 현실의 반영, 미래에 대한 희구가 문화 속에는 녹아 있게 마련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동안 조폭영화가 잘 나간 것은 ‘정글의 논리’가 팽배해진 시대상을 반영했다. 가혹한 구조조정으로 힘센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와 ‘조폭마누라’같이 ‘강한 여성’을 내세운 영화들은 사회 밖으로 밀려난 ‘고개 숙인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남자가 빈둥빈둥 집에서 놀고 있는 반면 여자들이 돈벌이에 뛰어든 가정이 많아지면 이런 영화가 안 나올 수 없다.

경찰영화, 그것도 법을 철저히 집행하는 경찰관을 다룬 영화들은 사실 대중의 구미를 돋울 만한 색다른 소재는 아니다. 오히려 그저 그런 평범한 소재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영화가 이 시점에서 수백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대중적 인기를 모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며 이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 의미는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혼란의 시기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지고 있는 혼돈상은 침묵하는 다수에게 이 나라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중은 영화 속에서나마 원칙이 중시되고 법이 철저히 집행되는 경찰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관객들이 구체적으로 이런 것을 의식하고 경찰영화를 보았든, 아니면 그냥 보았든 대중의 인기가 쏠린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하나의 사회적 트렌드임에 틀림없다. 권력자가 읽어내야 할 민심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새 정부 들어 사람들은 정부가 국민 편이 아니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진보니 사회적 약자니 하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불법행동도 불사하는 집단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만 결집된 힘과 발언권을 갖지 못하는 다수의 진정한 약자들은 소외되고 있다. 계속되는 혼란으로 정작 고통받는 쪽은 이런 사람들이다.

▼성실한 사람들의 후회 ▼

더욱 안 좋은 것은 성실하게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온 방식을 후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평소 자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바르게 살라고 가르쳐온 부모들은 자신이 한 말에 부끄러움마저 느끼고 있다. 출세에는 ‘코드’가 맞아야 하기 때문에 공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성공의 확률을 높일 수가 없다. 불법 행동을 거부하고 법과 원칙을 차근차근 따르는 것은 손해 보는 지름길일 뿐이다. 근로가 최고의 미덕이라고 종업원들을 독려하는 기업주들도 한번 ‘작업’에 몇 년 치 연봉을 앉아서 버는 부동산 투기 앞에선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된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박 형사처럼 뒤바뀐 현실 앞에 분노와 자책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권력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혼란을 추스르고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다.

홍찬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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