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조문현/"자존심 조금만 낮춰 보세요"

  • 입력 2003년 6월 13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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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현
필자는 3년 전 정년을 12년 앞당겨 50대 후반에 명예퇴직을 했다. 막상 퇴직하고 보니 세상에는 결코 쉬운 일이 없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퇴직 후 1, 2년 동안은 비교적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허전함과 소외감을 갖게 됐다. 출퇴근하는 동료들이 부러웠고, 등산이나 여행도 계속 다닐 수 없어 무척 힘들고 지겨웠다.

보수와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 하려 해도 50대 후반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금빛 평생교육 봉사단’의 일원이 되어 틈틈이 봉사를 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절실하게 느꼈다. 다방면으로 구직 활동을 하던 중 최근 운 좋게도 빌딩관리단에 채용되었다. 난생 처음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명예퇴직 전까지 체면과 자존심을 중시하면서 살아왔지만 빌딩 관리는 자존심과 체면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직종이기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 뒷자리에 앉아 눈물을 닦아내며 ‘이걸 꼭 해야 하나, 나에게는 안 맞아, 그만두자’고 여러 번 마음먹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의 중심가라 행여 ‘아는 사람 만날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낮에는 안내 데스크에 깊숙이 내려앉아 있기 일쑤였다.

경비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안내 데스크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임의로 버렸다가 안내원과 로비 담당 여자 청소원에게서 “왜 마음대로 쓰레기통을 버리느냐”며 질책을 당하고 말다툼을 벌이게 됐다. 모처럼 의욕적으로 한 일로 괜한 오해를 사게 되자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이 회사 사장께서 다가와 “여러가지로 힘드시죠? 자존심과 체면을 한 단계만 낮추시면 됩니다” 하고 격려해주었다. 나는 그 한 마디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듯이 내가 원한 일이니 여기에 나를 맞추자.’

마침내 어려웠던 순간들이 지나가고 첫 급여를 받던 날, 오랜만의 성취감에 울컥 목이 메었다. 나의 ‘제2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문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인주빌딩관리단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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