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푸드]독일 팔츠지역 포도주 농장 만찬 참가기

  • 입력 2003년 6월 12일 16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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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버나드 부인(44)의 만찬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25일 오후 6시 라인강 서쪽의 구릉지 젤러탈의 그녀 집 정원에서 시작됐다. 낮에 가늘게 뿌린 비는 1739년에 지어진 벽돌 2층 저택과 정원의 장미나무를 골고루 윤기 나게 적셔 놓았다.

버나드 부인은 오래 공들여 이 만찬을 준비했다. 손님들은 ‘독일의 유기농(organic) 와인’을 취재하기 위해 5개국에서 온 11명의 기자들과 독일와인협회 임원들. 독일 제2의 와인 생산지인 팔츠지역에서 1세기 넘게 운영돼온 ‘얀손 버나드’ 와인농장의 3대 계승자이자 생태주의적인 방식으로 포도주를 생산하는 독일 와인농들의 민간 연합체, 에코빈(Ecovin)의 회장인 버나드 부인은 사무실에서의 프레젠테이션 대신 만찬을 택했다. 주제는 ‘장미와 와인’. 요리의 코스마다 장미와 와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젤러탈=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 아페리티프(ap´eritif·식전주)

정원 테이블에 장미꽃잎을 떨어뜨린 2000년산 리즐링 샴페인잔이 놓였다. 샴페인 거품과 함께 입안에서 씹히는 장미꽃잎은 쓰지도 달지도 않은 풋맛이다.

5월 말은 구릉지인 젤러탈에서 장미가 가장 화려하게 피는 때. 버나드 부인은 3년 전부터 부지런히 정원과 포도밭에 유럽종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수십종의 장미나무를 심었다. 장미는 포도가 건강한지를 알게 해주는 자연지표다.

“장미는 포도나무와 생존법이 아주 흡사한 식물입니다. 예민하면서도 자족적이죠. 포도나무 옆의 장미가 시든다면 포도나무에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하는 경보음으로 여깁니다.”

장미꽃은 나비와 벌을, 그 나비와 벌을 먹으려는 새를 포도밭으로 불러들였다. 살충제를 쓰는 동안 ‘침묵했던’ 포도밭은 이제 새소리와 벌레들이 내는 미세한 소음으로 요란하다. 포도나무에 꽃이 피면 벌레들과 새들은 부지런히 꽃가루를 옮기며 앞으로 잉태될 포도송이의 맛을 결정한다.

● 허브 샐러드

만찬 식탁이 차려진 곳은 100여년 전 우사로 지어졌던 곳. 중세 수도원 양식의 회벽 천장에는 식탁 위 촛불이 드리우는 그림자들이 은은히 비쳤다.

“여러분이 지금부터 드실 샐러드는 양상추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제 포도밭에서 자라는 갖가지 허브들이 재료예요. 전통적인 포도농장에서는 포도밭에 포도나무 이외의 어떤 풀이나 나무도 자라지 못하게 하죠. 하지만 생태주의 방식의 와인농들은 포도나무 사이에서 클로버같이 뿌리가 깊게 내리는 풀들을 자라게 합니다. 이 뿌리들이 얽혀 땅이 씻겨 내려가지 않게 됩니다.”

손님들 앞에 샐러드 접시가 놓이자, 버나드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명했다.

‘포도밭에서는 오로지 포도나무만 자라게 하라’는 단일경작의 원칙은 팔츠지방에서 포도주 농사가 시작된 이래 2000여년 간 지켜져 온 원칙이다.

그러나 풀 하나 없는 석회질 토양의 땅은 비가 오면 허물어져 내린다. 봄철이면 산 아래로 흘러내린 고운 흙을 산 중턱 포도밭으로 양동이에 옮겨 담아 이고 나르는 노동이 포도원 여자들의 몫이었다. 이제 풀들이 자라는 버나드 부인의 포도원에서는 누구도 양동이에 흙을 옮겨 나르지 않는다.

“드레싱은 장미기름과 올리브오일로 만들었어요. 올리브오일은 와인의 좋은 친구죠. 드레싱에 식초를 아주 조금만 넣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신맛이 너무 강하면 더불어 마시는 와인의 향미를 버린답니다.”

샐러드와 함께 서빙된 포도주는 드라이한 2000년 게뷔르츠트라미너와 2002년산 리즐링 클래식, 2002년 리즐링 카비넷이었다.

● 수프와 아이스바인

뜻밖의 조합이었다. 사슴고기를 우려낸 짠맛의 수프에 다디단 아이스바인을 서빙한 것은…. 잔에 따라진 두 종류의 아이스바인은 2002년산 리즐링과 2001년산 게뷔르츠트라미너. 꿀물처럼 단 아이스바인은 대개 디저트주로 마시거나 디저트에 곁들여지는 만찬의 마지막 주역이다.

“수프는 몇 번씩 우려내며 오래 끓여야 하고, 아이스바인은 나무에 달린 포도알들이 추위속에 건포도처럼 쪼그라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둘 다 오랜 시간 끝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죠. 또 짠맛은 단맛을, 단맛은 짠맛을 마치 흑백의 조합처럼 도드라지게 합니다.”

버나드 부인은 93년 포도농장을 이어받은 이래 2002년에야 처음으로 아이스바인을 수확할 수 있었다.

아이스바인은 언 상태의 포도알에서 얻을 수 있다. 언제 포도알을 딸 지 결정하기 위해 11월 말부터 버나드 부인은 달을 지켜보았다. 초승달에서 보름달에 이르는 동안 수확한 포도송이에서 가장 향기가 빼어난 아이스바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대개 크리스마스가 아이스바인 수확의 적기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생태주의 와인농들은 일률적인 시간표를 고집하지 않아요. 한 밭의 포도나무라도 저마다 수확 시기가 다르거든요. 그건 포도송이를 만져보며 대화해 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꼭 자기 손으로 포도를 땁니다. 아이들을 제각각 개성 따라 달리 키우는 것과 같은 이치죠.”

● 메인디시-아스파라거스와 송아지 고기

5월 말 라인강 서쪽으로 펼쳐지는 포도생산지 팔츠나 그보다 더 남쪽의 슈바르츠발트(黑林)지역의 어느 집에서든 식사 초대를 받았다면 흰 아스파라거스와 딸기는 반드시 먹게 되는 제철 식재료다.

만찬의 메인요리인 암송아지 스테이크에도 부드러운 흰 아스파라거스와 크림소스에 버무린 감자가 곁들여졌다. 이곳에서 자라는 아스파라거스는 팔츠의 주요 포도 품종인 리즐링과 더불어 이 지역의 흙과 기후를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다. 둘 다 여름에도 비가 적은 건조한 기후와 물이 쉽사리 빠지는 석회질 땅에 잘 자라는 작물들이다.

버나드 부인은 젤러탈의 전통적인 포도원 문화에 두 차례 ‘혁명’을 일으켰다. 첫째는 여성으로서 포도농장을 계승한 것. 버나드 부인이 자라던 시절, 여자들은 포도밭에서 일할 수는 있어도 집안의 지하 와인 저장고에는 출입할 수 없었다.

두 번째 ‘혁명’은 생태주의로 생산방식을 바꾼 것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우리 집안처럼 가족들끼리 포도농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큼 선대에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재배방식을 고집스레 지키려 하죠. 하지만 가족들에게 땅이 계승되기 때문에 내 아이들이 계속 살아갈 대지를 더 이상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한번 마음을 바꾸면 쉽게 일치단결해 전통을 바꾸는 강점도 있습니다.”

고기요리라고 무조건 적포도주를 곁들이는 것은 아니다. 메인요리와 함께 서빙된 드라이한 2001년 게뷔르츠트라미너 슈팻레제에서는 생강향이 났다. 버나드 부인은 “향신료가 강한 아시아 요리와도 잘 어울리는 와인”이라며 식탁 건너편에서 미소 지었다.

버나드부인의 정원에서 커다란 보울에 담긴 샴페인을 잔에 따르는 참석자들. 베르사이유 조약 이후 프랑스 외의 지역에서 생산된 발포성 와인에는 샴페인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게 되자 독일인들은 ‘젝트(Sekt)’라는 이름을 붙였다. 꽃이 만발하는 5월이면 독일의 각 와인농장들은 전년도에 수확해 6개월간 숙성시킨 와인을 단골들과 소매업자들에게 선보이는 야외 시음회를 연다.젤러탈=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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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즈, 장미향 아이스크림 그리고 아우스레제

만찬이 끝을 향해 치달으면 달콤한 와인이 식탁의 주역이 된다.

만찬에서 와인의 서빙순서는 식전주로 마시는 샴페인을 제외하면 단 맛이 없는 드라이한 것에서 달콤한 것으로, 백포도주에서 적포도주나 분홍빛의 로제와인으로 옮겨간다.

디저트에 앞서 입가심으로 나온 염소치즈에는 2001년산 게뷔르츠트라미너 슈팻레제와 99년산 리즐링 슈팻레제가 곁들여졌다. 한창 제철인 딸기로 만든 무스케이크와 장미꽃잎을 갈아넣은 아이스크림에는 2001년산 슈팻버건더 로제와 2000년산 샤도네이 아우스레제가 곁들여졌다.

한 계절에 함께 성숙하는 식물들이어서일까. 장미꽃잎 색의 로제와인은 딸기무스케이크와 어울리고,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신맛이 여운을 남기는 아우스레제는 입안의 장미아이스크림의 잔향을 더 짙게 했다.

와인과 요리 어느쪽이 식탁의 주인공일까. 독일와인협회 아민 괴링 지배인은 “난 언제나 요리를 먼저, 그 다음에 와인을 선택합니다. 와인이 식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주객이 바뀐 일이죠. 어떤 요리라도 그 맛을 더 살려주는 와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게 독일 와인의 경이로움이에요”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온 와인 칼럼니스트 드미트리 코시레브는 “아니, 와인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완결체예요. 난 음식과 곁들이지 않은 와인 그 자체의 맛을 지지하겠소”라고 맞받았다.

커피로 만찬이 마무리 된 시간은 자정. 손님들을 대표해 괴링 지배인이 여주인과 식탁 앞에 도열한 요리사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저는 생태주의 방식의 삶이든 오르가닉 와인의 맛이든 지루하고 단순할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만찬이 제 편견을 바꾸었어요. 단맛과 신맛 짠맛이 때로는 조화를, 때로는 날카롭게 대립을 이룬 오늘밤의 와인과 요리들을 먹고 마시며, 인생의 재미도 그런 조화와 대립의 역동성 속에 있다는 걸 새삼 떠올렸습니다.”

젤러탈=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단맛나는 리즐링 한국요리와도 잘 어울려▼

● 독일의 유기농와인이란?

독일의 유기농와인생산자단체인 에코빈(www.ecovin.de)에 따르면 △살충제,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클로버 등 뿌리가 깊은 풀이나 허브 등을 포도밭에 길러서 자연적으로 지력을 높이고 △꽃들을 포도밭에 자라게 해 곤충에 의한 수분을 장려하는 생태주의적인 방법으로 포도를 재배한 뒤 거기서 수확한 포도주를 일컫는다. 물론 포도주를 병에 담을 때 방부제도 쓰지 않아야 한다. 이는 92년산 포도주부터 유기농에 대한 기준을 마련한 유럽연합(EU) 규정보다 엄격한 것이다. 반면 주(州)마다 유기농와인에 대한 규정을 달리하는 미국의 경우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화학비료 등을 써서 재배했어도 병에 담을 때 방부제를 넣지 않은 정도에 ‘오르가닉와인’이라는 레이블을 붙일 수 있다.

독일의 유기농와인은 전체 와인농작지의 1% 수준.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유기농와인 규모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2003년 라인헤센 지역의 가이젠하임대 학부 과정에 세계 최초로 유기농와인 생산법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생기는 등 후발 주자로서 피치를 올리고 있다. 유기농와인을 수출하는 와인제조회사 레 켄더만(www.reh-kendermann.de)의 엘리자베스 스틱은 “독일 에코와인이라면 기준을 더 엄격히 잘 지켰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선입견이 수출에 도움을 준다”고 밝혔다.

꽃과 풀들이 포도나무와 어울려 자라는 생태주의 농작법의 포도밭. 풀들은 땅이 쓸려내려가는 것을 막고 꽃들은 꽃가루를 옮겨줄 메신저인 곤충들을 불러 모은다. 사진제공 에코빈

● 독일 대표와인은 리즐링(Riesling)?

가장 많은 지역에서 생산되며 가장 뛰어난 품질의 독일 화이트와인. 2000년 기준으로 독일 전체 포도밭의 21%가 리즐링 생산지다.

리즐링의 맛은 토질과 기후에 따라 대단히 개성적이다. 모젤강을 낀 모젤-자르-루버 지역의 리즐링이 상대적으로 달콤하고 과일향이 풍부하다면 라인헤센이나 팔츠지역의 농부들은 입안에 광물성(minerality) 맛이 많이 느껴질수록 ‘우아한 리즐링’이라고 여긴다. 바덴지역의 유서 깊은 포도농장 ‘마크그라프폰바덴’의 지배인 아크힘 키르흐너는 “리즐링은 자신이 자란 땅의 성질을 거울같이 비춰주는 포도주”라고 평했다.

리즐링은 대개 향신료가 강한 아시아요리와 잘 어울린다. 매운맛이 강한 한국요리에는 리즐링 슈팻레제(Sp¨atlese) 등 풍미가 더 강하거나 단맛이 느껴지는 리즐링이 적당하다.

● 독일은 레드와인을 생산하지 않는다?

슈팻부르군더(Sp¨atburgunder), 별명 피노누아(Pinot Noir)로 불리는 적포도주는 리즐링에 버금가는 품질의 독일산 레드와인. 슈바르츠발트(黑林)를 끼고 있는 독일 최남단 포도주생산지 바덴에서 가장 많이 재배된다. 최근 독일인들의 와인 기호는 급격히 백포도주에서 적포도주로 옮겨가는 추세다. 1990년에는 레드와인의 생산면적이 전체 포도농지의 16.2%였지만 2000년에는 26.0%로 늘어났다. 화이트와인은 전체 생산량의 90%가 수출된다.

독일 최남단의 포도생산지 바덴지역의 에코빈 회원들이 5월24일 연례 유기농와인시음회를 벌인 프라이부르크의 카우프하우스 홀. 와인 도소매업자들, 유기농식품만을 취급하는 전국적인 매장 ‘나투르코스트라덴’의 바이어 등이 전년도에 수확해 새로 시장에 출하될 유기농 와인을 이곳에서 미리 맛보고 주문한다. 프라이부르크=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 독일 와인은 단맛의 정도로 구분?

영국의 와인칼럼니스트 몬티 월딘은 “독일 와인농들은 포도 성숙의 각 단계에 맞춰 어떻게 포도주를 달리 빚어낼지를 기막히게 잘 아는 장인들”이라고 평한다. 포도알의 수확 시기를 달리해 풍미와 당도가 다른 와인을 생산해내기 때문.

카비넷(Kabinett)은 정상적인 수확시기에, 슈팻레제는 정상적인 수확보다 1주일 정도 늦게 딴 것으로 양자간의 당도 차이는 크게 없지만 슈팻레제 쪽의 풍미가 진하다. 아우스레제(Auslese)는 늦게 따는 것 중에서도 품질 좋은 포도송이를 선별한 것, 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와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는 가장 성숙하고 품질 좋은 포도알들을 하나씩 따서 모아 꿀처럼 진한 맛의 포도주를 짜낸 것으로 디저트용이다. 아이스바인(Eiswein)은 나무에서 언 상태의 포도알을 따서 만든 것으로 단맛과 신맛이 고농축됐으며 역시 디저트용이다.

● 독일와인 품질 해독법은?

와인병의 상표를 해독하는 것으로 기본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트로켄(Trocken)은 단맛을 느낄 수 없으며, 할프트로켄(Halbtrocken)은 그보다는 당도가 있지만 역시 와인애호가들이 “드라이하다”고 평하는 맛이다.

대개 와인병에 크게 표시되는 것은 라인헤센, 팔츠, 바덴 등 13개로 구분되는 독일의 와인생산지역 중 어디 산(産)인지와 리즐링, 뮐러 투르가우(M¨uller-Thurgau) 질바너(Silvaner) 등 어떤 품종인지다.

당국의 품질관리를 통해 등급판정을 받은 고급품에는 QbA가 따라붙으며 카비넷, 슈팻레제, 아우스레제, 베렌아우스레제, 아이스바인,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 등 6개의 등급은 QmP라는 표시가 부기된 최고품질의 와인에만 부여되므로 이 6개 등급표만 보고도 품질을 짐작할 수 있다.

(통계자료 출처:독일와인협회)

프라이부르크·오펜하임·빙겐=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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