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 장편소설 '까마귀' "나가사키의 영혼이 날 깨웠다"

  • 입력 2003년 6월 10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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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로 일시에 아수라장이 된 일본 나가사키(長崎), 그 신음소리와 고함, 비명….

소설가 한수산(57)은 10여년 전의 어느 날 새벽, 소스라치듯 놀라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손바닥만한 여관방에는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자료, 죽음과 피와 뼈의 자료들이 널려 있었다. 작가는 자문했다.

소설가 한수산은 “이번 소설을 쓰면서 우리 민족이 왜 이렇게 못났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며 “다음 작품은 고결한 한국인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주일기자

“왜 내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을 써야 하는가. 이 신음소리를 겪어내야 하는가. 그러나 알고도 쓰지 않는다면, 쉽게 가기 위해 쓰지 않는다면 작가로서 사회적인 직무유기다. 이런 생각들로 그 밤에 흐느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수산의 장편소설 ‘까마귀’(전5권·해냄)는 이 눈물의 다짐인 셈이다. ‘까마귀’는 일제 패망기에 나가사키로 징용을 간 뒤 원폭에 희생된 피폭 한국인들의 비극적인 삶을 담고 있다. 소설의 제목은 ‘1945년 8월의 폭염 속에 썩어가던 피폭 한국인의 시신에 까마귀떼가 달려들었다’는 증언에서 따왔다.

UC 버클리대 한국학연구소 방문학자로 미국에 머물고 있는 작가는 소설 출간을 맞아 일시 귀국했다. 1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다.

“어쩌면 81년 겪은 ‘필화’ 사건이 이 소설을 낳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당시 권력자의 외모를 비아냥거렸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어야 했던 그는 몸과 마음이 지쳐 궁여지책으로 일본행을 택했다. 그곳에서 자연스레 재일교포 3세들에게 관심이 끌렸고 곧 ‘왜 이들이 이곳에 남게 됐나’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답을 찾던 중 피폭 한국인을 만나게 됐다.

“조국을 잃었다는 이유로 타국에 징용을 가서 빈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입니다. 피폭으로 인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구조받지 못한 이들입니다. 이렇게 내팽개쳐진 사람들을 나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89년 첫 취재 이후 15년여 동안 이 작품에 매달려 온 작가는 “한국인 피폭자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작은 에피소드 하나도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없을 정도다. 그는 “어떻게 사실을 소설 속에 생경하지 않게 녹여낼 것인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초’ 등의 작품을 통해 70년대를 대표하는 감성작가로 손꼽혀 왔지만 90년대 들어 새로운 작품세계를 펼쳐보였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과 반공포로 등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집 ‘4백년의 약속’, 기마부대의 군사혁명과 그 종말을 그린 ‘말 탄 자는 지나가다’ 등에서 가족 및 이웃공동체와 역사의 격랑을 살피게 된 것. 이제 그는 역사를 ‘재현’하겠다고 말한다.

“개인과 내면에서 가족사로 관심이 옮겨 가면서 근대사와 연결이 되더군요.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이 있었어요. 작가의 방법으로 역사를 재현해 새로운 한국인을 발견하려 합니다. 또 이것이 작가의 사회적인 의무이고요.”

가벼움만을 좇는 오늘의 독자에게 피폭 한국인 이야기를 전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월요일인가 오후 6시쯤 모범택시를 탔는데 날더러 첫손님이라고 하더군요. 불경기라는 이야기겠지요. 이런 때 5권짜리 장편을 냈으니…. (웃음) 읽히지 않는 소설이 무슨 존재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독자들에게 뭔가 남겼으면 하는, 또 뭔가 남기리라는 믿음으로 ‘까마귀’를 썼습니다.”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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