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임채청/'바람과 물'은 거스를지 몰라도

  • 입력 2003년 6월 10일 18시 23분


코멘트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국민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의문 하나가 풀렸다. 그가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마친 뒤 왜 “속이 다 후련하다”고 얘기했는지 이해가 됐다. 동시에 그의 일본 방문은 결코 후련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예감은 맞았다. 그의 귀국 일성 역시 “착잡하다”는 것이었다.

해답의 열쇠는 백범(白凡)어록에서 따온 ‘대붕역풍비 생어역수영(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이라는 그의 좌우명에 있었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물고기는 물결을 거슬러 헤엄친다는 뜻의 이 말은 그를 읽을 수 있는 핵심 코드였다. 뭔가를 거스를 때만 성취감을 느끼는 그의 정치생리를 ‘역(逆)’이라는 한 글자보다 더 잘 드러내는 게 있을까 싶다.

노 대통령은 국내 회견에선 기자들의 질문을 종종 거슬렀다. 국민이 보고 있는데도 정색하고 언성을 높여 언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방일 전날 이기명씨에게 보낸 공개편지도 사실은 언론에 대한 성토문이었다. 반면 일본에서의 그는 시종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는 후련하게 떠났지만 착잡하게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정치권 주변엔 이런 얘기도 나돈다. “노 대통령이 무엇을 하도록 하려면 그것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편이 효과적이다”고.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무엇을 하지 않도록 하려면 그것을 하라고 주문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노 대통령의 체질화된 ‘거스름의 정치’에 대한 풍자라고 해도 뒷맛은 씁쓸하다.

지난 세기는 ‘반역의 세기’로도 불린다. 각 분야에서의 창조적 반역이 유례없는 진보를 가져다준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민주화도 반역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고, 노 대통령은 그 흐름을 타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선 때 ‘노풍(盧風)’의 동력도 이 같은 거스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기성의 권위와 권력, 질서와 체제에 격하게 맞서온 노 대통령의 모습이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불러일으켰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노 대통령은 더 이상 도전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 됐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습관적으로 거역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남이 자신을 거역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언론에 대해 그렇다. 어쩌면 언론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도전과 거역의 대상이라는 인상마저 준다.

이처럼 달라진 처지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인식 결여가 언행의 자기모순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현 정부의 혼돈과 방황, 혼란과 불안정의 요인이 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강조해온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요인도 된다. 대통령이 자꾸 누군가를 거스르고자 하는데 전 국민이 하나로 합쳐질 리 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백범이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존경하는 인물도 링컨으로 바꿨다고 했다. 그러니 성공한 지금은 좌우명도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것쯤으로 바꿨으면 한다. 하늘의 뜻을 따르느냐 거스르느냐에 따라 존망이 갈린다는 뜻으로, 하늘의 뜻은 곧 민심을 말한다. 역(逆)이 아니라 순(順)이 국정을 관류해야 나라와 국민이 두루 편안하다.

임채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