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니가타의 ‘만경봉號 몸살’

  • 입력 2003년 6월 8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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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 접한 일본 서북부의 항구도시인 니가타(新潟) 시내는 일요일인 8일 우익단체의 시위와 소음, 경찰의 검문검색이 맞물려 하루 내내 몸살을 앓았다.

북한 만경봉호의 입항을 저지하겠다며 전국에서 모여든 우익단체 회원들은 확성기를 켜고 북한규탄 구호를 외쳤다. ‘천황 폐하를 지키자’ ‘일본의 혼을 살리자’ 등 만경봉호와는 관계가 없는 그들의 단골 격문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납치피해자 가족모임’이 개최한 만경봉호 입항 반대집회에는 니가타현 지사와 집권 자민당의 중진의원들이 연사로 나서 “북한의 만행을 이대로 좌시해서는 안 된다”며 강경 분위기를 주도했다.

일본 경찰은 1500여명을 항구 주변과 시내 곳곳에 배치했지만 우익단체의 집회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만경봉호 승무원과의 불상사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오사카(大阪) 경찰까지 버스로 8시간이나 걸려 니가타에 ‘응원 출동’을 왔다. 한 택시 운전사는 “전국의 경찰과 우익은 다 모인 것 같다”며 “만경봉호가 그렇게 대단한 배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우익의 위세에 위축된 듯 총련의 니가타본부는 철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여건상 수십년간 북한과의 교역창구 역할을 해온 인구 53만명의 아담한 항구도시는 ‘괴상한 나라’ 북한에 대한 혐오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냉정히 따지자면 일본 우익이 니가타에서 궐기할 명분을 준 쪽은 북한이다. 일본에서도 특히 니가타 인근 주민이 북한에 납치된 사례가 유독 많았다. 최근 탈북 기술자가 미 의회 증언에서 만경봉호가 미사일 부품의 수입통로로 이용됐다고 주장한 것도 우익에는 더없이 좋은 호재다.

그러나 만경봉호 입항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대응은 우익단체 뺨칠 정도로 일반 국민의 혐북(嫌北) 감정을 부추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찰 세관 입국관리소는 물론 경제산업성까지 나서 만경봉호의 미확인 범죄 혐의를 흘리면서 단속에 한몫 하겠다고 나섰다. ‘북한을 강하게 때릴수록 부처의 애국심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묘한 경쟁심리가 일본 정부 관계자들을 지배했다.

우방인 한국 대통령의 방일 중에 유사법제를 통과시킬 정도로 외교에서 대범함을 과시한 일본 정부가 북한 선박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지나친 게 아닐까. 북한이 만경봉호의 출항을 보류함에 따라 물리적인 불상사는 일단 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만경봉호 해프닝’에서 보여준 일본 정부와 우익의 행태는 일본의 ‘북한 혐오증’이 이성적인 판단의 단계를 넘어선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박원재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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