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월드 워치]“美-濠공세 막아라” 비상걸린 ‘와인왕국’

  • 입력 2003년 6월 8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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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지방 지하 와인 저장소의 박제균 특파원.
부르고뉴 지방 지하 와인 저장소의 박제균 특파원.
《지금 세계는 ‘와인 전쟁’ 중이다. 미국 호주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이른바 ‘신대륙’ 와인의 도전에 와인 왕국 프랑스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5년간 프랑스의 와인 수출은 매년 최고 5% 감소하거나 제자리걸음이었다. 반면 신대륙의 와인 수출은 매년 10% 이상의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프랑스 농무부가 발표한 보고서도 “신대륙의 야만인들이 프랑스 문턱까지 몰려왔다”고 경고했을 정도. 이런 신대륙 와인의 도전에도 프랑스의 부르고뉴(Bourgogne) 와인은 흔들림 없이 와인 명가의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다. 부르고뉴 와인의 본고장을 찾아 그 응전의 현장을 살펴봤다.》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전설’로 통하는, 두말이 필요 없는 세계 최고의 와인이다. 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 지방의 로마네 콩티 포도밭을 찾은 때는 포도 열매로 성장할 좁쌀 같은 알갱이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5월 말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로마네 콩티 포도밭 모습은 주변의 여느 포도밭과 다를 바 없었다. 경사면에 자리 잡은 총면적 1.8ha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밭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포도밭 주위로 담이 둘러쳐 있을 뿐. 동행한 부르고뉴 와인 관계자는 “이웃 밭의 토양과 섞이지 않도록 담을 둘러쳤다”며 “이웃 밭에서 나온 와인 가격과 최소한 10배 이상 차이날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네 콩티는 프랑스에서도 웬만한 와인 전문점에서는 찾기 어렵다. 찾더라도 1병에 수백만원 하는 가격이 주눅 들게 한다. 로마네 콩티를 만든 환경 때문일까. 로마네 콩티 인근의 포도밭은 대부분 최상급 와인인 그랑 크뤼(Grand Cru) 급 와인을 생산해내고 있다.

로마네 콩티 같은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부르고뉴 지방은 보르도(Bordeaux)와 함께 프랑스 와인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보르도 와인이 중저가부터 최상급까지를 망라한다면 부르고뉴 와인은 중상급 이상이 대부분.

프랑스에는 원산지명칭통제(AOC·App-ellation d’Origine Controllee)라는 제도가 있다. 프랑스 정부는 포도 품종과 재배 방법, 양조 방법과 단위 면적당 와인 생산량 등을 심사해 기준을 통과한 와인에만 원산지 명칭을 붙일 수 있게 했다. 프랑스 전체 와인 생산 포도밭의 4.6%에 불과한 부르고뉴에서 나오는 AOC급 와인은 프랑스 전체 400여종 가운데 25%에 달하는 100여종이나 된다.

대량 생산 방식의 중저가 ‘신대륙 와인’이 프랑스 와인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음에도 부르고뉴 와인의 수출량과 수출액은 꾸준히 늘고 있다. 부르고뉴 와인 생산량 1억5000만L는 전 세계 생산량의 0.6%에 불과하지만 수출액은 전 세계 와인 거래액의 5%를 차지한다. 부르고뉴 와인 총매출액 10억유로(약 1조4000억원)의 56%가 수출에서 나온다.

부르고뉴 와인이 신대륙 와인의 격랑에도 불구하고 순항하는 비결은 뭘까. 이 지방의 와인 명가 알베르 비쇼(Albert Bichot) 가문이 운영하는 샤토(Chateau) 클로 드 프랑탱(Clos de Frantin)을 찾았다. 샤토란 본래 성이나 대저택을 뜻하는 말이지만 포도주와 관련해서 쓰일 때는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원을 말한다.

지난해 3300만유로(약 460억원)의 매출액을 올린 비쇼 가문의 수출 책임자 아리프 자말 박사는 “부르고뉴 와인이 신대륙 와인의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비결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통”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의 안내로 따라간 와인 공장에서는 지금도 스테인리스 스틸 발효통 대신 오크 발효통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테인리스 스틸 발효통은 공정을 통제하기가 쉽고 경제적이어서 ‘신대륙 와인’은 물론 프랑스 와인 생산업체에서도 사용이 늘고 있다. 그러나 와인의 맛과 향을 내는 데는 오크 통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

세계 최고 와인인 로마네 콩티가 나오는 포도밭 전경. 토양이 다른 밭과 섞이지 않도록 담장을 세웠다.-부르고뉴=박제균특파원

발효한 와인을 숙성시키는 와인 저장고인 지하 카브(Cave)도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말 박사는 “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카브는 연중 온도를 섭씨 12∼15도, 습도는 70∼80%로 유지시켜주는 자연 에어컨”이라고 말했다. 부르고뉴의 와인 명가는 대부분 18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카브를 갖고 있다.

여기에 수대째 내려오는 와인 가문의 노하우가 부르고뉴 와인의 명성을 받치고 있다. 1831년 와인 사업에 뛰어든 비쇼 가문의 6대손 알베릭 비쇼(38)는 “어릴 때부터 와인 사업 이외의 다른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비쇼 가문의 노하우 가운데 하나는 뿌리가 밑으로 길게 자라게 한 포도나무와 옆으로 넓게 퍼지게 한 포도나무에서 나온 와인을 섞는 것. 밑으로 길게 자란 나무에서 나온 와인은 미네랄 성분이, 옆으로 넓게 자라게 한 나무에서 나온 와인은 과일 향이 풍부하기 때문이란다.

또 AOC 와인 규정은 포도밭 ha당 5500L 이상의 와인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비쇼 가문은 이를 4000L 이하로 제한, ‘소수정예’만을 내놓고 있다. 와인을 파는 곳도 고급 식당과 면세점, 항공기 1등석 등으로 제한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화이트 와인의 명품 슈발리에 몽하셰(Chevaliers Montrachet)를 생산하는 퓔리니 몽하셰 지역의 와인 명가 ‘도멘 장 샤르트롱(Domaine Jean Chartron)’의 장 미셸 샤르트롱 사장(33) 역시 수대째 가업을 잇고 있었다. 슈발리에 몽하셰는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때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게 선물했던 와인.

이 가문의 노하우 중 하나는 와인을 담는 오크통을 3번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 150년 이상 된 참나무로 제작되는 오크통은 한 통에 2000유로(약 280만원) 정도의 고가품. 신선한 오크통일수록 와인의 풍미를 높인다. 샤르트롱 사장은 “시장 상황이 나쁠수록 생산비를 낮추기보다는 품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승부한다”고 말했다.

부르고뉴에서 만난 와인 생산업자들은 오히려 신대륙 와인이 부르고뉴 와인 판매에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와인 맛을 모르던 소비자들이 값싼 신대륙 와인으로 입맛을 훈련한 뒤 고품질의 부르고뉴 와인을 찾는다는 것. 자말 박사는 “신대륙 와인은 대량 기술 공정으로 맛이 표준화됐다는 점에서 언제나 맛이 같은 ‘늙은 와인’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구대륙 와인은 매년 다른 자연 환경이 새로운 맛을 제공하는 ‘젊은 와인’”이라고 강조했다. 새로움이 지배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부르고뉴 와인의 경쟁력은 전통을 중시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데서 나오고 있었다.

부르고뉴=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부르고뉴지방 와인

▼“한국인 미각뛰어나 시장 잠재력 매우 커”▼

“‘신대륙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은 시장이 다르다. 와인에 대한 미각이 발달하면 부르고뉴 와인을 찾게 된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와인 수도’라 불리는 본의 부르고뉴포도주사업자연합회(BIVB) 사무실에 만난 위베르 카뮈 BIVB 회장(66.사진)은 미국 호주 칠레 남아공 등 이른바 ‘신대륙 와인’의 도전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BIVB는 부르고뉴 와인 생산 중개업자 등이 낸 회비로 운영되는 단체. 회원은 5000여명이다.

―보르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데….

“보르도 와인이 생산 수출 면에서 프랑스 최고임은 분명하다. 생산 규모가 크므로 마케팅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맛과 향은 부르고뉴 와인이 최고다.”

―이라크전 여파로 미국에서 프랑스 와인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영향은 없나.

“아직 없다. 반프랑스 감정보다는 유로화 가치 상승과 미국 경제 악화로 구매력이 떨어지는 게 더 문제다.”

―한국 시장을 어떻게 평가하나.

“지난 주 화이트 와인 생산지역인 샤블리에서 회의를 했는데 한국 시장에 대한 화이트 와인 수출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인들은 한 번의 식사를 하면서 10가지 다른 반찬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미각이 발달한 한국인들의 구매력이 높아졌으므로 기대해 볼 만하다.”

카뮈 회장에게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부르고뉴에서는 의사보다 포도 농사꾼이 오래 산다.

의사는 물을 마시지만 포도 농사꾼은 와인을 마시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지금도 하루에 반 병 정도 마신다는 그는 “5세 때부터 포도 농사꾼이었던 아버지가 와인의 맛을 가르쳤다”고 덧붙였다.

본=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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