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홍사종/구석구석 文化가 흐르게

  • 입력 2003년 6월 6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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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종경기도 문화예술회관장 · 전 숙명여대 교수

“투란도트 보셨어요. 당연히 보셨겠지요.”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이니까 장안의 화제였던 오페라를 못 봤을 리 없을 것이라는 ‘예단’이 담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그 화제의 오페라를 보지 못했다. 스펙터클한 쯔진청(紫禁城) 무대장치와 조명, 그리고 매머드 출연진의 위용과 뛰어난 연출 감각, 이 모두 내겐 궁금증의 대상이지만 못 봤다.

▼도시엔 공연 과소비 농촌엔 TV뿐 ▼

못 본 이유는 간단하다. 입장료 50만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물론 3만원짜리 입장권도 있다지만 그걸 사서 경기장 꼭대기에 쪼그리고 앉아 목 빼고 보느니 안 보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이 50만원짜리 표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고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하긴 닳으면 버릴 팬티 한 장에도 50만원을 호가하는 세태에 생의 한 순간을 황홀한 추억으로 아로새겨 줄 공연 티켓 50만원은 아깝지 않은 돈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입장료가 비싸다는 유명공연만 있으면 떼 지어 몰려오는 관객들의 면면에 있다. 평소 음악회를 자주 찾던 사람보다 생전 보지 못한 사람들, 아니면 표를 상납받은 고관 나리 일색으로 메워지는 관객 구성은 문화 과소비로 옮아간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병리현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나는 뭔가 남들과 다르다’는 의식을 전제로 ‘문화 명품(?) 소비를 통해’ 우쭐한 기분을 맛보고 싶은 일부 사회적 허위의식이 작용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외국에서도 사례가 드문 이런 비싼 공연이 아무렇지 않게 올려지는 것도 문젭니다.” 며칠 전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자선공연을 경기도문화예술회관과 함께 준비하던 신세대 피아니스트 이루마씨가 던진 말이다. ‘지방 구석구석, 때로는 불우이웃도 생활 속에서 문화와 만날 수 있어야 문화 선진국’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인데 나 역시 동감이다.

우리나라의 문화계는 대도시 중심의 문화편중으로 동맥경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관객들의 허위의식을 거꾸로 읽어 들어간 상술과 맞물린, 소수를 위한 문화 확대재생산 구조도 문제다. 이 와중에서 지방의 문화예술계가 온전한 기반을 유지할 리 없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경기도만 해도 지역 안에서의 문화편중은 심각할 정도다. 서울을 에워싼 도시지역 주민들은 그래도 적당한 수준의 문화향수 기회를 누리는 편이다. 그러나 읍면 단위 농어촌 지역의 문화혜택 불균형은 치유되어야 할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농촌은, 일과 놀이가 공존하며 농악패와 함께 공동체의식을 다져오던 옛날의 농촌이 아니다. 함께 나눌 문화가 사라져 버린 농민들은 일터로부터 각자의 공간인 집으로 돌아가 곧바로 TV상자에 갇힌다. 공동체적 연대는 사라졌고,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도 한 달 동안 얼굴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농촌공동체의 붕괴는 농촌 문화의 공동화(空洞化)에 기인한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과 같은 세계적 규모의 대공연장도 성에 안 차 경기장으로까지 나가 초대형 무대를 외치며 50만, 60만원짜리 입장권이 발매되는 뒤안길에는 이처럼 무너져 내리는 농촌공동체의 모습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시대 우리의 문화수준을 높여줄 내실 있는 작품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대형 이벤트 공연 등으로 동맥경화증을 일으키고 있는 대도시 중심의 문화활동에서 눈을 돌려 소외된 곳에 문화의 향기를 실어 나르는 문화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할 때다. 요즘 경기도 예술단체들이 읍면까지 찾아가 호응을 얻고 있는 ‘모세혈관 문화운동’은 그런 뜻에서 무너져 가는 농촌지역의 공동체를 복원해 나가자는 취지에서 만든 프로그램이다.

▼외진곳 찾는 ‘모세혈관 운동’ 필요 ▼

“이런 구경 정말 처음이에요.” 경기도 국악단 민요팀이 찾아간 시골 작은 초등학교 강당에서 한 할머니가 던진 이 한 마디는 이 나라 문화 수요와 공급의 현주소를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는 말이 아닐까.

홍사종 문화예술회관장·전 숙명여대 교수

윤정국기자 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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