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운명' 등…"비인간화 현대사회도 아우슈비츠"

  • 입력 2003년 6월 6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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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 그는 어린 시절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바탕으로 ‘운명’ 3부작을 썼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 그는 어린 시절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바탕으로 ‘운명’ 3부작을 썼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운명/임레 케르테스 지음 모명숙 박종대 옮김/292쪽 9500원 다른우리

◇좌절/임레 케르테스 지음 한경민 옮김/456쪽 1만5000원 다른우리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임레 케르테스 지음 정진석 옮김/200쪽 8500원 다른우리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헝가리에선 케르테스 임레로 부른다)는 사회적 힘과 폭력이 개인의 종말을 강요하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고 사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천착해 왔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유럽의 통상적인 역사 바깥에서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근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타락의 극한적 모습으로 보았다. 그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잠재력을 내재한 사건으로 홀로코스트를 규정한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모든 대표작은 그가 10대 시절에 겪었던 아우슈비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운명(Sorstalans´ag)’, ‘좌절(Kudarc)’,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Kaddis a meg nem sz¨uletett gyermek´ert)’로 구성된 ‘운명’ 3부작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들 작품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배경으로 하여 동일한 주인공이 계속되는 인생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고통 받고, 어떠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첫 작품 ‘운명’은 15세의 유대인 소년이 아우슈비츠수용소로 끌려가는 과정과 수용소 생활, 부다페스트로의 귀환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운명’을 통해 케르테스는 삶과 죽음이 오가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 것,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 작품 ‘좌절’은 ‘운명’의 주인공 쾨베시가 50대 작가가 되어 아우슈비츠에서 나온 후 전개된 자신의 삶의 역정을 글로 써나가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케르테스의 인생철학과 문학관의 총체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두려움과 실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바로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이다. 작품 원제에 붙어있는 ‘커디시(Kaddis)’란 유대인들이 장례식 때 부르는 노래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의 죽음을 노래한다는 아이러니가 드러나 있다. 이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단호한 거부다. 아우슈비츠라는 비인간적 존재를 허락했던 이 세상에서 인류 역사의 지속성, 즉 생식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운명’ 3부작을 통해 케르테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역사 속의 아우슈비츠는 사라졌다. 그러나 개인성을 상실하고 비인간화된 현대사회는 아우슈비츠와 너무나도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헝가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케르테스의 ‘운명’ 3부작이 한글판으로 출판됨으로써 지금까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수준 높은 헝가리 문학을 독자들이 접할 수 있게 되어 전공자로서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유진일 한국외국어대 헝가리어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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