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박철희/'현충일 訪日’ 성숙한 양국관계 계기

  • 입력 2003년 6월 5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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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방일 날짜가 현충일이라는 이유로 국내에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러 현충일로 잡은 것은 아닐진대 호국영령에게 참배하는 날에 일왕(日王)에게 머리를 숙인다 하여 굴욕외교라는 비판이다. 물론 일본과의 과거사를 떠올리면 이해가 가지 않는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현충일 방일이 저자세 외교인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먼저 우리는 한국 대통령이 일왕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식의 ‘자격지심’을 버려야 한다. 노 대통령은 일본을 국빈(國賓)으로 방문한다. 일본에 머리를 숙이러 가는 게 아니다. 손님으로 가서 일왕이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는 것이다. 일본은 1년 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왕의 일정을 바꿔가면서까지 노 대통령을 국빈으로 맞는다.

왜 그리 한일 정상회담을 서두르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는 북한 핵문제 때문이다. 5월14일 한미 정상회담, 5월23일 미일 정상회담에 이어 열리는 6월7일 한일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일 3국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마무리단계 회담이다. 북핵 문제 해결은 우리의 중차대한 관심사이자 지역안정을 위한 급선무다. 그렇기에 당사자인 한국이 빨리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미국에 이어 일본의 지도자 및 국민을 향해 북핵 개발 반대를 확실히 하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공동대응을 약속해야 한다. 북핵 문제가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한일간 의견조율은 하루를 다투고 있다. 결국 정상들이 결단해야 할 정치적 사안이기 때문이다.

또 현충일에 일본을 방문하는 것은 과거를 뒤로 하자는 정치적 메시지도 아니다. 요즘 과거사로 발끈하는 쪽은 오히려 일본이다. 한국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예전보다 성숙하게 대응하고 있다. 우리가 펄펄 뛰며 반성하라고 하지 않아도 일본에 과거사는 커다란 짐이다. 일본이 과거사의 굴레를 벗지 못하면 동북아의 맹주도, 세계의 지도적 국가도 될 수 없다. 과거의 짐은 일본에 넘겨주자. 과거사는 일본이 일으킨 문제이고, 일본이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현충일의 대통령 방일은 한국의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줄 것이다. 노 대통령은 현충일에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일본에 간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고 직시한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노 대통령은 한국의 우려를 조용하지만 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과거사 문제를 떠들썩하게 비판한다면 한국이 바뀐 게 없다고 선전해댈 일본의 우익세력만 기쁘게 할 것이다. 한국은 과거를 절대 잊지 않고 있지만, 성숙한 한일관계를 위해 일본에 왔음을 알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국가원수가 외국을 방문하면 통상 상대국 국립묘지를 방문한다. 일본에는 그런 시설이 없다. 한국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위패까지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리 만무하다. 한국에서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일본에 간 한국 대통령이 일본에서 참배할 국립묘지가 없다는 것은 일본의 불행이다. 노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일본에 그러한 국가시설이 필요함을 새롭게 인식시켜줄 것이다. 외교당국이 야스쿠니신사를 대체하는 시설을 지으라고 백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외국 대통령이 참배할 국립묘지가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외교적 압력이 되지 않을까.

박철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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