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고영회/기술사가 되어본들…

  • 입력 2003년 6월 4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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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란 단편소설을 대학시절에 읽은 적이 있다. 능력은 있으나 현실에서는 실업자로 지내는 한 사내가 자기의 구두를 항상 빛나게 닦아 보관한다는 것이 그 줄거리다. 여기서 빛나는 구두는 자기 자존심의 표현이다. 요즘 자기 구두를 닦고 있는 이공계 출신들이 많아 걱정이 앞선다.

공대를 나온 필자는 엔지니어에게 최고의 자격인 기술사(技術士)를 2종목(건축시공, 건축기계설비)이나 취득하고서도 기술사에 대한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지 않아 30대 중반의 나이에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변리사 공부를 시작했다. 변리사 공부를 시작할 때의 기술경력이 12년이었다. 기술경력 12년이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나이인데도 인생의 진로를 변경해야 했으니 개인이나 국가로 볼 때 불행한 일이었다. 왜 30대 중반에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야 했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기술자로서 성공할 수 없는 사회구조 때문이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경력12년 희망안보여 새길 찾기 ▼

비전문가가 전문가 영역을 침범해 전문가는 자신에게 보장된 영역마저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기술사는 전문적 응용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항에 대해 계획, 설계, 감리, 평가, 기술 판단, 기술 중재 등을 직무(기술사법 3조)로 하며 시험을 통해 배출된다. 그런데 기술사에게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는 달리 업무영역에 대한 법적 방어 장치가 없다. 기술사 아닌 사람이 기술사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이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건설기술관리법 등에 따라 기술사가 아닌 사람도 기술사와 동등하게 대우해 주는 소위 ‘인정 기술사 제도’가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은 기술사가 더 이상 엔지니어들의 희망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변리사도 마찬가지다. 산업재산권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특허는 기술에 관한 것이어서 변리사는 과학기술과 법령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해야 하는 전문가다. 그런데 법학을 전공한 사람이 대부분인 변호사에게는 변리사가 자동적으로 되는 길이 열려 있다. 변호사가 된다고 해서 변리사로서 일할 수 있는 전문성이 생기는 것이 아닌데도 자동적으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전문성을 해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또 변리사는 소송대리인이 될 수 있는 규정(변리사법 8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법원에서는 변리사를 소송대리에서 배척하고 있다. 산업재산권에 관한 전문가가 법에 규정된 업무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인 것이다. 이러고도 이공계 기피 현상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많은 젊은이들이 사법시험에 매달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중앙인사위원회에서 행정부 5급 이상 공무원의 업무와 전공을 조사한 적이 있다. 행정부 내 전문기술 분야의 업무가 55% 정도인 데 비해 기술직 공무원은 20% 미만이었다. 이는 행정직 공무원이 기술직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공계 출신의 기술직이 맡아야 할 자리를 행정직이 대신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공계 전문성 인정않는 풍토 ▼

이같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재 정부에서 마련한 병역특례, 해외유학 보조금 지급, 초중고교에 우수 과학교사 배치 등의 정책들은 실효성이 없어 일시적 사탕발림과 같은 것이다. 이런 임시방편식 정책으로는 우수 학생들을 이공계로 유인할 수 없다.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려면 이공계 출신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술사와 변리사 등 이공계 출신 전문가들이 안고 있는 허탈감과 상실감을 보람과 긍지로 바꿔놓을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일을 하면서도 꿈을 갖지 못하고 자기 구두만 닦고 있는 이공학도가 더 이상 생기지 말아야 하겠다.

▼약력 ▼

△1958년 출생 △진주고 졸업(1977)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1981) △서울대 건축학과 박사과정(2001) △대한기술사회 회장(2003)

고영회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겸 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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