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고기정/姜공정위장의 ‘原論 정책’

  • 입력 2003년 6월 3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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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유럽에 가 보니 한국 정부의 반(反)독점정책을 G5(선진 5개국)나 G7(선진 7개국) 수준으로 평가했어요. 경쟁정책 분야에서는 우리 위상이 높더군요.”

강철규(姜哲圭) 공정거래위원장은 3일 유럽 출장 얘기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날 브리핑 주제는 6대 그룹에 대한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9일부터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대기업 투자 촉진’을 강조한 바로 다음날 나온 발표였다.

강 위원장은 미묘한 시점임을 감안했는지 사전 설명을 길게 했다.

“우리 경제는 하강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경기 변동은 늘 있는 것입니다. 경기 하강기는 구조조정을 통해 체질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퇴출시킬 기업은 퇴출시켜야 회복기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경제성장률로 넘어갔다.

“그래도 우리 경제는 1·4분기에 3.7%나 성장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보다 훨씬 높습니다.”

브리핑이 끝난 뒤 강 위원장은 “부당내부거래 기사가 신문에 아주 조그맣게 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들 관심이 많군요”라며 자리를 떴다.

경제학 교수 출신답게 그의 설명은 일목요연하고 논리정연했다. 하지만 지금 강 위원장은 교수가 아니라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 책임자 중 한 명이다. 기업인이나 학자는 물론 대부분의 정책당국자도 요즘 한국경제가 장기침체냐 회복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염려한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경제에 온 힘을 쏟겠다고 하는 판국이다.

구조조정 주장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썩은 가지는 쳐내야 한다. 하지만 홍수로 잠긴 논도 물이 빠져야 썩은 벼를 걷어내는 법이다. 최소한 지금은 ‘퇴출’ 운운할 한가한 시점이 아니다.

최근의 침체를 ‘경기순환이론’이라는 경제학원론 수준의 논리로 안심해도 좋을까. 정말 그런지도 논란이지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경제장관이 함부로 할 말은 아니다.

경제가 이미 성숙단계에 접어들어 저성장이 체질화된 선진국과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비교한다는 것 역시 무리다. 비상이 걸린 경제현실을 외면하고 한국의 반독점정책이 선진국 수준으로 평가받는다는 자화자찬(自畵自讚)도 씁쓸하다.

강 위원장은 “최근 경기가 악화되면서 곳곳에서 이미 예정된 공정위의 반독점정책이 연기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이는 다른 부처에서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칙대로 갑니다”라고 말했다.

정부 내에서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인식이 결여된 원칙은 자칫 융통성이 없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愚)를 낳을 수 있다.

고기정 경제부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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