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고인은 육군 방첩부대장 육군 특전감 3군단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79년 초 제22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할 때까지 계속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에게 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은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10·26사태 직후 비상체제에서 고인은 계엄사령관에 임명돼 막강한 권한을 쥐게 된다. 그러나 그의 천하는 1개월 보름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12·12사태를 일으켜 군을 일거에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군 장성들이 신군부 세력에 체포돼 심한 고초를 겪고 강제전역을 당했으며, 일부는 총격으로 중상을 당하기도 했다. 신군부 세력은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재가 없이 서울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에서 고인을 강제 연행했다.
신군부는 고인을 연행한 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해 연행 재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노재현(盧載鉉) 당시 국방부장관을 통해 대통령이 재가토록 설득했다.
그러나 12월 13일 새벽 결국 최 대통령은 고인의 연행을 재가했고 고인은 보안사로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한 뒤 보충역 이등병으로 전역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고인은 내란방조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뒤 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됐다.
침묵을 지키던 고인은 87년 대통령선거 직전인 그 해 11월 당시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당 고문을 맡았다. 그는 당시 “12·12사태는 권력을 노린 일부 군인들의 반란이며 이를 막지 못해 국민이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유구무언이다”고 말했다.
고인은 97년 대법원이 12·12사태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한 뒤 내란방조혐의에 대한 무죄선고를 받고 예비역 대장으로 복권, 군 장성출신 모임인 성우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최근까지 파킨슨 병을 앓아왔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