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다시본다]"나라잃은 시대 겨레얼 지킴이"

  • 입력 2002년 4월 5일 18시 56분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는 일제가 사용을 금기시했던 ‘단군(檀君)’ ‘광복’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겨레의 얼을 지면에 반영하려고 노력한 ‘겨레 신문’이었다.”

국어학자인 경상대 려증동(呂增東·69·사진) 명예교수는 최근 펴낸 ‘나라잃은 시대 동아일보’(문음사 간)라는 연구서를 통해 동아일보의 창간 정신과 창간호 및 초기 보도에 대한 시대적 의미를 읽어냈다.

1920년 4월1일 창간호부터 같은 해 9월25일까지 동아일보 기사와 사용한 어휘 등을 세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담아낸 이 책은 ‘나라잃은 시대’에 겨레의 자존을 지키고 ‘광복 도모자’를 양성했던 매체는 동아일보가 유일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동아일보 사사(社史)를 펴낸 이들도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사실을 밝혀낸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이 시기 동아일보를 1년 넘게 10회 이상 정독, 분석했다는 것.

193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려교수는 경상대 인문대학장 등을 거쳐 1998년 10월부터 이 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199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국어교육론’ ‘고조선사기’ ‘배달 글자’ 등 10여권의 저서가 있다.》

저자는 동아일보가 창간호부터 ‘단군’을 명기하며 겨레 의식을 고취시킨 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동아일보’를 새긴 수건을 허리에 두른 어린이가 ‘언론(言論)’이라는 글씨 옆에서 오른손으로 ‘단군유지(檀君遺趾·단군이 남긴 발자취)’를 가리키고 있는 그림이 창간호에 실린 것.

려 교수는 “이는 동아일보가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우리 겨레를 겨레답게 만들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창간호에 실린 시 ‘비는 노래’(지은이 송산·松山)도 같은 뜻을 계승하고 있다고 그는 해석했다.

“단목(檀木)에 움이 나고, 근화(槿花)가 새로 필 때/동아일보 탄강하다/…/단목같이 굳은 뼈와 근화같이 고흔고기/설총의 지은 말로 세종이 만든 글로…”로 이어지는 이 시를 통해 국조(國祖)인 단군과 국화(國花)인 무궁화(槿花)의 민족사적 의미를 명백하게 드러내려 했다는 것.

려 교수는 또 동아일보가 당시 상하이 임시 정부와 긴밀했던 중국의 지도자 쑨원(孫文)의 친필 휘호인 ‘天下爲公(천하위공)’을 받아 창간호에 게재한 것을 상기시키며 “이는 동아일보가 출발부터 임정의 기관지임을 자임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저자는 초기 동아일보의 ‘겨레 얼 살리기’는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에게서 비롯됐으며 인촌은 3·1 운동에도 깊숙이 간여했다고 말했다.

려 교수가 주목한 기사는 1920년 4월7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기미 만세 의거인 예심결정서’ 중 ‘최남선은 관헌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이 회견치 않고 송진우로 하여금 계동 김성수 별택(別宅)에서 이인환과 회견하고 전기 계획을 고하여…’라는 대목.

이는 3·1 운동의 거사 계획이 1918년 11월18일 손병희 선생의 집에서 시작해 인촌 자택으로 이어지면서 준비됐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려 교수는 분석했다.

또 인촌은 문서상으로는 박영효(朴泳孝·1861∼1939)를 사장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일제와 친분이 있는 그를 통해 총독부에 신문 발행 허가를 얻으려는 것이었을 뿐, 실제로는 인촌을 비롯해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장덕수(張德秀·1895∼1947) 등이 동아일보를 이끌었다고 보고 있다. 박영효는 두 달 만에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려 교수는 “이런 인촌의 공적을 알지 못하는 일부 인사들이 최근 인촌을 친일 행적에 가담한 인물로 왜곡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동아일보는 일제 감시의 눈초리를 ‘세련되게’ 피하면서 항일운동을 펴나갔다는 게 저자의 분석.

1920년 8월29일 동아일보는 국치일 10주기를 맞아 매국노 이완용의 사진을 ‘오늘, 십주년의 금월 금일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던 날이올시다…’로 시작하는 기사와 함께 실었다. 려 교수는 “당시 이완용 암살단원들은 이완용의 얼굴을 잘 몰랐는데 동아일보가 사진을 실은 것은 그의 얼굴을 알리기 위한 뜻”이라며 “암살단에게 동아일보는 일종의 ‘수배 전단’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려 교수는 동아일보의 자랑인 ‘비판정신’은 일제의 압제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치열한 저항 정신은 광복 이후 반독재 투쟁을 거쳐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일구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분석했다.

일례로 1920년 5월22일자 기사 ‘농민의 대적(大敵)은 동척(東拓·동양척식주식회사·한반도 약탈을 위해 설립된 회사)’은 ‘일본인은 승낙없이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갖다쓰는 버릇이 있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려 교수는 “이런 글은 겨레 얼이 충만한 저항 정신이 없이는 나올 수 없다”고 강조했다.

려 교수는 “동아일보의 이러한 초기 전통은 나라 잃은 시대 내내 이어지는 것은 물론, 광복 후 나라를 바로 세우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 기여했다”며 “최근 매체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동아일보는 창간 정신을 새롭게 바로 세워 차별화된 언론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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