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 백제기원설 인정 의미 "월드컵 한일관계 개선"

  • 입력 2001년 12월 23일 18시 17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혈통' 문제까지 언급하며 한국과의 관계를 강조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이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의 황족들은 생일을 맞게 되면 공개적으로 기자회견을 갖는 것이 관례다. 23일의 기자회견에서 아키히토 천황은 한국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미국 테러사건과 국내의 장기불황, 황태자비의 출산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아키히토 천황의 '혈통'관련 발언은 내년 서울 월드컵 개막식에 자신이 참석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한국민에게 뭔가 우호의 메시지를 보내려 한데서 나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그 수준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가 한일 과거사에 대해 언급한 것은 98년 10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방일 때 "한 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준 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한 깊은 슬픔은 항상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 것이 가장 최근이다. 그에 비해 이번 발언은 훨씬 인간적이며 대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본 황실이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일본 역사서에도 기록돼 있기는 하다. 일본인들도 사석에서는 "천황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에서 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 그러나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돼 왔다.

천황의 이번 발언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아사히신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의미있게 보도하지 않았다. 천황이 정부측과 사전에 상의한 것 같지도 않다. 그저 기자회견을 앞두고 나름대로의 대한관(對韓觀)을 정리한 것 같다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그럼에도 그 영향은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천황이 직접 자신의 혈통이 한반도와 관계가 있다고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다. 천황의 이번 발언은 적어도 민간 차원에서 한일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데는 일본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일본 천황 발언요지▼

일본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한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나 초빙됐던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 문화나 기술이 전수돼 왔다. 궁내청 악부의 악사 중에는 당시 이주자의 자손으로 대대로 악사가 돼 지금도 아악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문화나 기술이 일본인의 열의와 한국사람들의 우호적 태도로 일본에 전해진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일본의 그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게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이때부터 일본에 5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어 왔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과의 교류에는 이런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을 앞두고 양국민의 교류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양국민들이 자신들의 국가가 걸어온 길을, 각각의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도록 노력해야 하며 개개인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이 양국민의 협력에 의해 원활하게 행해지고, 이를 통해 양국민의 사이에 이해와 신뢰감이 깊어지기를 바란다.

▼간무 천황은 누구▼

서기 781년에서 806년까지 재위했던 제50대 일본 천황. 혼란한 정계의 기풍을 혁신하고 율령체제를 재편하기 위해 794년 현재의 교토(京都)에 헤이안쿄(平安京)를 조성해 도읍을 옮겨 헤이안시대를 열었다. 헤이안시대는 간무천황 후 약 400년간 지속됐다. 그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후손으로 외래인이었기 때문에 황후에는 오르지 못하고 후궁의 지위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간무천황의 초상화를 보아도 다른 일본 천황들과 달리 대륙인적인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간무천황은 이런 출신 성분 때문에 정치적으로 실권을 장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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