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선정·폭력·엽기… 어글리 안방극장

  • 입력 2001년 12월 17일 17시 12분


《최근 지상파 TV의 선정 및 폭력성, 엽기적 내용들이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여장 남자의 가슴에 든 풍선을 펌프로 부풀리거나(KBS2 개그콘서트), 부부 관계를 담은 비디오를 거래하는(SBS 허니허니) 등 교양 드라마 오락의 여러 프로그램 곳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극적 장면이나 발언, 소재가 범람하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미디어워치팀이 최근 서울 및 경기지역 71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0%가 ‘방송 프로에 문제가 있다’고 대답한 것도 요즘 TV 프로그램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통계다.》

#어떤 내용들이 나오나

▽시트콤〓SBS ‘허니!허니!’(수 밤 11·05)는 심야 시간대 ‘부부시트콤’을 표방한다는 이유로 지상파에서 용인될 수 없는 수위를 들락거리고 있다. 12일에는 원희와 진수의 부부관계 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접수한 임호가 이를 빌미로 돈을 주지 않으면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올리겠다고 협박한다. 또 딸을 낳으려면 남성의 성기를 따뜻하게 한 뒤 부부 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은 영범이 바지를 내리고 전기 스토브 앞에 서 있는 장면을 내보내기도 했다.

▽아침드라마〓주부층이 많이 보는 아침 드라마에도 불륜이나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가 단골 소재다. SBS ‘외출’(월∼토 오전 8·30)에서는 바람을 피운 뒤 이혼을 요구한 남자,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은 미혼모, 미모로 남자를 유혹한 뒤 돈을 뜯어내는 꽃뱀 등 사회 통념상 용납하기 어려운 인간들이 얽히고 설킨다.

KBS 2 ‘새엄마’(월∼토 오전 8·05)나 MBC ‘보고싶은 얼굴’(월∼토 오전 9시)도 뒤틀린 가족 관계로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새엄마’의 경우 16세에 성폭행 당한 뒤 상대 남성의 아이를 낳고 후처로 들어가 본처의 자식들에게 구박받는 ‘새엄마’가 등장한다.하고 ‘보고싶은 얼굴’에서는 한 여성의 기억 상실증으로 두 가족이 엉망 진창이 된다.

▽오락〓KBS2 ‘한중일 삼국지’(월 밤 8·20)는 10일 ‘3국의 만두’편에서 개그맨 정준하가 2.5kg짜리 20인분 만두를 1시간 안에 먹는 것에 도전했다.

배부른 정씨가 괴로워하며 마지막 분량을 입에 우겨넣는 장면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구토’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MBC ‘목표달성 토요일’(토 오후 6·10)의 ‘애정만세’에서는 참치 통조림 속에 든 기름 마시기나 쌈장 한 숟가락에 생마늘 먹기 등 비정상적인 음식먹기 경쟁이 잇따라 펼쳐진다.

KBS2 ‘토요대작전’(토 오후 6·10)의 경우도 여성용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남성들이 상반신을 거의 드러낸 채 훌라후프를 돌리는 모습으로 혐오감을 주거나 여성 연예인들이 엉덩이로 기왓장 깨기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교양〓일부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괴기스런 소재가 방송으로 나오고 있다. MBC ‘타임머신’(일 밤 10·35)은 9일 오랫동안 위장병을 앓던 한 한 환자가 민간 요법을 맹신한 나머지 이웃집 갓난 아이를 죽여 약으로 달여먹은 사건을 재연했고 16일에는 서로 상대방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두 남자 이야기를 ‘한국 최초의 스와핑(부부 교환)’이라며 소개하기도 했다.

#왜 이런 내용들이 잦나

TV 프로그램의 선정성과 폭력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최근들어 심각해진 상황이다. 특히 11월초 가을개편 이후 방송사들이 오락 프로그램을 전진배치하면서 TV의 저질화에 가속도가 붙었다는 게 방송가의 진단이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이후 광고주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지상파 방송의 수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PD는 “예전에는 시청률이 다소 부진해도 광고 변동이 크지 않았으나 요즘은 1∼2%에 광고가 왔다갔다 한다”며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장이 프로그램 제작에 개입하는 형국이며 무리수를 둬도 시청률만 잘 나오면 눈감아주는 분위기”이라고 말했다.

방송국내 오락 프로그램이 너무 많은 것도 ‘저질 TV’의 한 요인.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소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짧은 시간내에 시청률을 올리려면 자극적인 소재를 쉽게 떠올린다는 게 오락 PD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또 지상파 방송들이 속성이 다른 매체인 인터넷이나 영화의 소재를 무분별하게 모방하는 것도 방송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방송가에서는 “시청자 확보를 위해 인터넷 유머나 영화에서 소재를 따오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말했다. 최근 지나친 폭력 묘사로 비난을 받고 있는 SBS 드라마 ‘피아노’도 영화 ‘친구’ 등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대책은 어디에…

‘저질 TV’를 규제할 현실적 기구는 방송위원회다. 위원회는 매일 TV의 방영 내용을 심의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위원회의 감시 활동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데다 위원회의 목소리에 대해 일선 방송사들이 콧방귀를 뀌고 있는 것.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박성희 교수는 “방송위원회의 제재 정도가 약해 방송사들도 심각하게 규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위원회의 심의 및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방송사 내부에서 선정적 엽기적 내용이 시청율을 올리기 위한 마땅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11월 개편에서 오락 위주의 공격적 편성을 했던 KBS2 채널의 PD들은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면서 시청률에 매달렸으나 상승폭은 기대에 못미쳤다”며 “이번 개편은 실패”라고 자체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아울러 방송사들은 시청자들의 의견에 보다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는 한편, 실효가 거의 없는 방송사 내부의 시청자위원회와, 자사 홍보나 문제 프로그램의 변명에 그치기 십상인 TV 옴부즈맨 프로그램의 활성화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수경기자>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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