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문화·인간/경제학]'풍요의 新世界' 영원한 수수께끼

  • 입력 1999년 12월 31일 19시 05분


경제학은 ‘현실’을 다룬다. 약리학자들이 다양한 조건을 설정해 놓고 생쥐를 실험하듯 이미 과거가 된 경제현상을 놓고 ‘원위치에서 다시 한번!’을 외칠 수는 없다. 현실엔 변덕이 심한 소비자, 그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가, 이들의 동태를 살피며 물량계획을 짜는 기업 등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공존한다.

경제학자들은 20세기 경제학은 ‘수많은 경제주체간 복잡한 상호작용을 꿰뚫는 일관된 이론정립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등 18, 19세기 대가들은 근대경제학의 이론적 토대를 쌓았지만 아직까지 풀지 못하는 난제들을 남겨뒀다.

한 시대를 풍미한 빛나는 이론체계가 ‘하수구에 버려지는’ 일은 경제학계에선 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들의 유산은 후대 정치관료들의 의사결정에 뚜렷한 영향을 끼쳐왔다.

▼마샬 미시경제학 터닦아▼

경제학의 고전중의 고전인 ‘국부론’이 출간된지 127년만인 1903년 세계최초로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경제학과가 설립됐다. 당시에는 중세를 지배했던 3가지 학문인 의학 법학 신학의 전통이 굳건했고 경제학은 도덕과학(철학)의 한 분과 취급을 받던 시절. 케임브리지의 알프레드 마샬교수는 경제학의 ‘독립선언’을 주도하면서 고전파 이론에 ‘한계이론’을 접목시켜 오늘날 미시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마샬은 상품의 가격이 한계론자들이 강조하듯 수요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측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 및 생산자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을 도출한 것은 마샬의 공로였다. 그는 또 경제학에 △장기와 단기 △탄력성 △세테리스 파리부스(‘다른 모든 사정이 같다면’이란 경제학 특유의 가정법) 등을 엄격히 적용해 경제분석을 한차원 끌어올렸다.

▼대공황으로 케인즈 대두▼

소련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한 것은 칼 마르크스가 사망한 지 34년뒤의 일. 사회주의 운동은 70여년동안 ‘계획경제’를 발전시키고 자본주의에 끊임없는 수정압력을 가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이론에 대한 평가는 ‘현실이 (정치적 동기에서) 엇비슷하게 따라갔을 뿐 이론체계가 타당한 것은 아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마르크시즘은 주류 경제학을 거북하게 만들었을 뿐 결정적 타격을 가하진 못했다.

오히려 1929년 대공황이 마샬이 집대성한 경제학에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 뉴욕 증시붕괴로 촉발된 대공황은 세계경제의 기관차인 미국경제의 실업률을 25%까지 끌어올렸고 국민총생산을 반으로 줄였다. 투자실패로 자살하거나 비상급식소 앞에서 아우성을 치는 노동자가 물결쳤다.‘보이지 않는 손’이 수요와 공급을 자동적으로 맞춰준다던 주류경제학의 뼈대에 중대한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마샬의 애제자였던 케인즈가 결국 ‘구세주’로 나섰다. 그는 경제주체들의 투자 저축 고용행태 등을 면밀히 분석한 뒤 자유방임 상태에서는 완전고용에 필요한 규모의 유효수요(소비 및 투자수요)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그의 저서가 ‘일반이론’이란 제목을 달고있는 것은 △저축과 투자의 매끄러운 연결 △임금 물가의 유연성 등 고전파 전제들을 오히려 특수사례로 간주했기 때문.

수요를 늘리는 뉴딜정책으로 케인즈의 진가가 드러나면서 경제학의 주류는 ‘수요중시(관리)’로 치달았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시절까지 경제 각료들 대부분은 ‘케인즈 추종자들’이었다.

70년대 오일쇼크와 함께 장기불황이 찾아오면서 케인즈이론은 밀튼 프리드만 등 통화론자들의 도전을 받는다. 프리드만은 1963년 펴낸 ‘미국금융사’에서 대공황의 주범으로 연방준비은행을 꼽았다. 통화량을 신축적으로 조절했던들 파국은 오지 않았으며 모든 역사적 불경기나 인플레이션 뒤에는 통화량 조절 실패가 있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의 이론은 정부의 소극적인 개입일지라도 부정하는 하이에크의 이론체계를 뿌리로 하고 있다.

▼90년대 신자유주의 득세▼

통화론은 70년대말 각국 중앙은행들이 통화량을 주요 변수로 간주하면서 케인즈이론을 밀어냈다. 그러나 통화론의 가장 중요한 전제였던 ‘일정한 유통속도(통화가 거래에 사용된 횟수)’가 흔들리면서‘케인즈언 대 통화론자간 대전쟁’은 절충형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경제학에서 ‘공급 측면’이 부활한 것은 80년대초 레이건행정부 시절.‘레이거노믹스’로 상징되는 공급경제학은 총수요 관리보다 생산력 증대를 통해 소득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기업의 투자의욕을 북돋울 필요가 있었다고 조세감면 정책이 대두됐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잇따른 조세 인상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 증가함으로써 공급경제학자들 역시 도전을 받고있다.

공급중시 경제학은 정부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기능 강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때마침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자본주의 시장이 급속히 확대하면서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시장개방을 촉구하는 이론적 토대가 됐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자본의 세계화가 개도국의 경제상황을 악화시켰으며 최근엔 일본 동남아 중남미 등의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는 비난이 무성하다.

세기말 정보통신 산업의 발달은 경제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기술발전은 조세나 통화관리 등 전통적인 정책수단들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점차 입증되고 있다. 한편으로 수확체감이나 합리적인 경제주체 등 기존 경제학의 대전제들이 무너지고 있고 우연성과 복수균형 등을 강조하는 ‘복잡계’경제학 및 진화경제학이 21세기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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