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1)

  • 입력 1998년 4월 30일 2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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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전화기가 놓인 창가의 탁자를 떠나지 못하고 쭈그린 채 앉아 있었다. 새로 이사한 집의 창은 남쪽으로 나 있어서 초봄의 까실까실한 햇살이 아침부터 낡은 커튼의 올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전화기 번호판사이의 아주 작은 틈새에 낀 오래된 먼지들이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1하고 2 사이 2하고 3사이…. 다만, 4하고 1 사이 그리고 2하고 1 사이 8하고 9 사이의 모서리들만 그 먼지들로부터 희미하게 벗어나 있었다. 4하고 1 사이하고 8하고 9사이하고는 아마도 어머니댁의 전화번호를 누르기 위해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한달 전 아직 바람이 찼던 겨울날 이 산비탈의 동네까지, 이삿짐 센터의 인부들하고 언성까지 높이며 웃돈싸움을 하고 난 이후로 어머니에게만 전화를 걸었을 뿐 전화기를 써본 일이 거의 없었다. 아니 있긴 했다.

가스를 설치하고 전화를 신청한 것은 아마도 전화가 나오기 전 주인집 전화를 빌려썼으니까 이 전화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마치 너무나 오래도록 미워했던 누군가하고, 마지막 오기까지 다 짜내어 전투라도 치르는 듯이 몇날 몇일 밤을 이삿짐을 정리하고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던 날, 갑자기 이 창으로 들어오는 부신 햇살에 눈을 떴을 때, 하얗게 눈앞으로 다가오는 아직 풀냄새가 풀풀 나는 새 집의 낯선 벽지와 자리를 바꾼 가구들을 망연히 바라보다가는 그런데 왜 이렇게 동네가 조용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불현듯 눈물이 쏟아졌고, 아아, 약해져서는 안돼 하는 생각에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집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반경이었다.

하필이면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은 사실은 짬뽕 국물이라도 좀 먹고 싶었던 생각에서였겠지만 전에 이 방에서 살던 사람들이 창문 모서리에 중국집 전화번호가 적힌 스티커를 붙여 놓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새로 이사온 이 조용하고 낯선 동네의 중국집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고 싶지 않을 만큼, 그리고 사실은 중국집에서조차 전화를 받지 않은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을 만큼 나는 사람들에게 지쳐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그때 이미 봉순이 언니를 생각했었다. 그것은 이십몇년만의 불현듯한 회상이었다. 나는 지금 방금 통화를 끝낸 어머니가 내게 전해줄 말을 벌써 예감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봉순이 언니를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봉순이가 없어졌단다.”

어머니는 요즘 가뜩이나 날카로워져 있는 나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어제 결혼식에서 우연히 대지골 사람을 만났는데 그러더구나…. 개 기르던 떠돌이 놈하고 눈이 맞은 것 같다는데 세상에 아비 다른 애들 넷을 놔두고서, 남부끄럽지도 않은지….”

“애들이 아직 한창 학교 다니잖아…. 근데 어디로 도망을 갔다는 거야?”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니? 큰 애야 저번에 광양으로 내려갔고 나머지 애들은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단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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