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46]「小統領」현철씨 주변 사람들

  • 입력 1998년 4월 30일 20시 08분


김영삼(金泳三·YS)전대통령이 퇴임한 직후인 3월 초.

구여권의 중진 J씨는 문안 인사차 김전대통령의 상도동 사저를 방문했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집을 나서는 J씨를 김현철(金賢哲)씨가 집 밖까지 배웅하러 나왔다. 승용차에 오르는 J씨에게 현철씨는 혼자말처럼 “못 믿을 건 사람이더군요”하는 말을 흘렸다.

J씨는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현철씨가 지칭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했다. 그의 뇌리에는 현철씨가 87년 남가주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다가 귀국, 아버지의 선거운동원으로 시작해 ‘소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10여년 동안 만나온 수많은 ‘현철씨의 주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YS의 가신들’ ‘광화문 사단’ ‘등산모임’ ‘경영연구회’ ‘안기부와 군의 간부들’ ‘경복고 고려대 인맥’….

93년 초 김영삼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까지 현철씨가 가장 자주 만나왔던 사람들은 이른바 ‘광화문 사단’ 멤버들.

87년 대선 당시 현철씨는 중앙대부속중 동창인 박태중(朴泰重) 윤성로(尹成老)씨 등 친구 10여명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달동네를 돌면서 열성적으로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결과는 쓰라린 패배였다.

▼ 보수세력 「철부지들」 비난

여론조사의 필요성을 절감한 현철씨는 박태중씨와 함께 88년 1월 서울 여의도 동화빌딩에 중앙조사연구소라는 여론조사기관을 개설했다. 현철씨에게 ‘김소장’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이때부터.

현철씨는 4·26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제3당으로 전락,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정치참모로 성장했다. 그후 90년 3당 통합 후 현철씨는 연구소를 민주사회연구소(민사연)로 확대개편했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미진빌딩 4층에 문을 연 민사연에는 중앙조사연구소 멤버에 30대 석박사 엘리트 20여명이 충원됐다.

‘광화문 사단’은 민사연 멤버와 연세대 학생회장 출신인 이성헌(李性憲·한나라당 서대문갑지구당 위원장)씨가 이끈 ‘언론분석팀’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

청와대 행정관으로 특채됐던 민사연 멤버 J씨의 설명.

“YS는 민자당 대표시절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의 주례회동 때 민사연에서 올린 정세분석보고서를 중요 참고자료로 활용했고 노대통령도 보고서 내용에 관심을 나타낼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언론분석팀이 밤새 만든 보고내용은 이성헌씨가 매일 새벽 YS와 조깅을 하면서 브리핑했고 YS가 이들의 건의에 따라 대선기간중 말투나 의상까지 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민사연 멤버들은 대선기간중 YS의 사조직인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의 브레인격인 총괄기획팀에서 활동하다가 청와대 비서관과 행정관으로 대거 특채됐다. 언론분석팀에서는 이씨 등 3명이 청와대에 특채됐고 나머지 멤버는 공보처 전문위원으로 계속 일했다.

결국 청와대에 입성한 30대 ‘광화문 사단’멤버는 채영일 고영규 김현호 이성헌 임세희 정상환 김선동 박영찬 김양수씨 등 20여명.

이들은 청와대내 민정 정무 총무 교문사회 공보 등 각 수석실에 포진했다. 스스로 ‘젊은 개혁세력’이라는 의식을 공유한 이들은 정권초기 개혁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놓았다.

이들에 대해 보수세력은 ‘검증받지 않은 운동권 철부지’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들은 진보진영으로부터는 ‘보수권력 내부에서 개혁을 이끌어낼 장교단’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문민정부 5년간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K씨의 설명.

“김소장은 가끔 청와대내 젊은 비서관들을 불러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비서관들이 국정현안에 대해 브리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김소장은 비서관들보다 훨씬 높은 사람들한테서 국정에 관한 고급 정보를 이미 듣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대통령 취임 이후 현철씨는 이미 청와대 각 수석이나 안기부 김기섭(金己燮)기조실장 등과 국정을 논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비서관이나 행정관급의 보고를 구태여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다른 인사도 “현철씨는 93년 중반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안기부 등 각 공조직의 고위층에 신경망을 구축해 놓았다”고 말했다.

현철씨가 중요하게 접촉했던 광화문 사단 멤버는 당에 남아있던 신모씨.

현철씨와 미국유학 도중 같이 귀국, 중앙조사연구소 시절부터 함께 했던 여론조사 전문가인 신씨는 당에 잔류하면서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공천작업 때 당과 현철씨를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96년 2월 총선 공천작업 당시 현철씨가 신씨를 통해 자기 사람들을 공천대상에 올리자 김윤환(金潤煥)당시 신한국당 대표가 YS와 담판, 명단 일부를 바꾸는 일까지 벌어졌다.

민정계 인사들은 지금도 “현철씨가 자신이 미는 사람들을 공천받도록 하기 위해 여론조사 결과를 조작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한편 현철씨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져 ‘소통령’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자 현철씨를 이용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부에서조차 가장 큰 지탄의 대상이 된 인물은 총무수석실의 K비서관. K비서관은 민주계지만 홍인길(洪仁吉)전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의 사람으로 당초 현철씨의 직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청와대에 들어간 K비서관은 현철씨에게 밀착했고 정재계 인사들에게 ‘나를 통하지 않으면 현철씨를 만나기 어렵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치곤 했다.

K비서관 등이 애용하던 강남 룸살롱 주인 S씨는 “K비서관 일행은 팁만 1백만∼2백만원을 쓰는 등 재벌2세처럼 행동해서 술집 아가씨들한테 인기가 대단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재계인사들이 현철씨와 접촉하기 위해 애타게 쫓아다닌 사람은 역시 현철씨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측근인 박태중씨.

박씨는 중국 옌볜(延邊)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가져 간 YS시계가 떨어지자 외교행낭을 통해 시계를 추가로 공수해갔을 정도의 위세를 과시했다.

또 현철씨의 수행비서를 지낸 정대희(鄭大喜·35)씨는 청와대에서 보직도 없이 무적근무를 계속하다가 물의를 빚었다.

현철씨의 위세를 이용한 주변인물들의 행태를 알 수 있는 일화 하나.

95년 중반. 중견건설업체 오너 2세인 김모씨(37)는 부산시가 발주하는 대형건설공사 입찰건 때문에 현철씨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김씨의 설명.

“몇단계를 거쳐 현철씨의 측근이라는 C씨를 만났습니다. 소개료 1천만원을 요구하는 바람에 의심이 들었지만 돈을 줄 수밖에 없었죠. 롯데호텔 커피숍으로 나오라는 말을 듣고 나갔더니 정말 현철씨가 옆 테이블에 일행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C씨는 ‘오늘은 김소장이 바쁘니 다음에 보자’고 말해 그냥 호텔을 나왔는데 그후 감감무소식이더군요. 나중에 알고 지내던 청와대비서관을 만나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김소장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김소장은 아마 모르고 있을테니 없던 일로 하라’고 말해 그냥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현철씨는 YS의 청와대 입성 이후 자연스럽게 재계의 이른바 황태자 그룹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 일부는 한보비리청문회 시절 한보그룹 정원근(鄭源根)상아제약 회장이 김모 청와대비서관을 통해 현철씨를 만났다고 증언해 일반에 알려졌다.

황태자그룹은 30,40대 기업인들의 모임인 ‘경영연구회’멤버중 현철씨와 친한 이웅렬(李雄烈)코오롱그룹회장 조수호(趙秀鎬)한진해운사장 주장건(朱將建)세종투자개발사장 등을 두고 하는 말.

▼ 이성호씨와 『呼兄呼弟』

그러나 현철씨와 가장 가깝게 지낸 재계인물은 대호건설 이성호(李晟豪)사장이었다. 이사장은 현철씨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현철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이씨는 83년 미국유학 시절 알게 된 여론조사전문가 신씨의 소개로 90년 현철씨를 소개받아 92년 말부터는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현철씨와 이씨 일행이 서울 강남의 R룸살롱이나 H호텔에서 어울리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한두명이 아니다. 이사장과 현철씨의 밀착관계는 황태자 그룹 멤버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됐을 정도였다. 룸살롱 마담 S씨의 목격담.

“하루는 재벌 2세들끼리 술집에서 말싸움이 크게 붙었어요. 이사장이 현철씨를 독점하고 다른 재벌 2세들에게 현철씨와 어울릴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게 이유였지요.”

현철씨는 이사장 소유의 서울 서초동 대호빌딩 지하 헬스클럽에 가끔 나타났는데 이를 안 기업인들이 현철씨를 만나러 오면 이사장이 바로 옆 미용실로 빼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씨가 검찰수사과정에서 현철씨가 구속되는데 결정적인 진술을 하면서 이들의 관계도 끝장나고 말았다.

청와대비서관으로 일한 L씨는 4월 초 미국에서 귀국한 이씨를 만났다.“현철씨와의 인연을 후회하지는 않느냐”는 L씨의 질문에 이씨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현철이 형을 만나 피해도 많이 봤지만 한가지는 크게 배웠습니다. 형을 따라다니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의 쾌감이 뭔지, 권력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 체험했으니까요.”

〈이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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