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장하성/노동자가 재벌개혁 감시할 때

  • 입력 1998년 4월 30일 20시 08분


노동자들은 너무도 당혹스럽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가 되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해 선진국이 되었다고 그랬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경제위기다, 잘못하면 나라 전체가 부도날 수도 있다는 심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가늠하기도 전에 정리해고의 바람이 불고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더구나 오늘의 경제 위기가 노동자들만의 잘못인 양 위기극복을 위한 구조개혁은 정리해고로 시작됐고 정리해고로 끝날 상황이다.

▼ 현 상황 악순환의 고리 ▼

기업을 부실로 몰고간데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총수도 경영진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간 관치 경제의 책임자들인 경제관료와 정치인들은 아직도 밥그릇 싸움만 하며 큰소리치고 있다. 개혁의 대상들이 오히려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통 분담을 외치던 노사정 합의는 노동자들의 고통 전담으로 가고 있고 재벌들은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개혁에 저항하고 있다.

경제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할 재벌과 경제관료 그리고 정치권이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고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만 강요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노동자들은 스스로 생존권을 지켜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할 뿐이다. 국가를 위해서 그리고 회사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것은 시장경제가 아니다. 노동자들만 손해보고 고통받아야 한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한 극한적 수단을 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과 경기 불황으로 인한 실업이 겹쳐 있는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가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 구조조정이며 이는 일시적이나마 필연적으로 더 많은 실업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기 회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서 파업은 공멸(共滅)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파업과 같은 극한 수단을 쓰기보다 재벌 개혁에 스스로 앞장서야 한다.

재벌 기업은 노동자들이 우리사주조합을 통해 주주로서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재벌들이 부당내부거래로 회사를 멍들게 하고 총수들이 잘못된 경영을 하고 회사돈을 빼돌리는 범죄를 저지른다면 노동자들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감시자의 역할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소액주주로서 이를 막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투자자들이 기업을 믿고 투자할 수 있도록 투명 경영을 실천해낼 수 있는 힘을 노동자들은 갖고 있는 것이다.

실업을 막는 최선의 방안은 기업을 살리는 것이다. 부실기업을 파산의 길로 가게 하는 것보다는 제삼자에게 인수케하는 것이 기업을 살리고 노동자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 방안이다. 노동자들이 종업원으로서 그리고 소액주주로서 총수들의 전횡적인 경영을 감시하고 부실 경영을 하는 총수와 경영진에 책임을 물음으로써 개혁을 촉진해야 한다. 외국자본이라도 좋다. 어차피 개방 경제에서는 누가 더 많은 고용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느냐가 중요하지 자본의 국적은 의미가 없다.

▼ 기업살려 실업 막아야 ▼

희망이 있어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재벌 개혁은 노동자들에게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꿈과 희망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재벌과 정부는 정리해고에 앞서 노동자들이 나만 손해보는 것 아니냐 하는 피해의식과 상대적인 박탈감에서 벗어나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노동자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장하성<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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