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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 무너진다 上]대량실업 태풍 「도심廢家」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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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 무너진다 上]대량실업 태풍 「도심廢家」급증

입력 1998-04-28 20:15수정 2009-09-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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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가라앉고 무너지는 것뿐인 대량실업 시대, 우리들의 ‘둥지’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온식구가 똘똘 뭉쳐 위기를 헤쳐나왔던 ‘구심력 가정’은 옛말인가. 이제 가족간 거리가 멀어지고 끝내 해체로 치닫는 가정이 늘고 있는 현실이다. 5월 가정의 달을 앞두고 고통받는 가족 구성원의 모습과 그 사회적 대안 모색을 3회에 걸쳐 싣는다.》

농촌에만 폐가(廢家)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하에 대량실업 바람이 휩쓸고 있는 요즘 대도시 저소득층이 모여사는 동네에도 사람들의 온기가 끊긴 폐가가 생기고 있다. 사회보장이 취약한 우리 사회에서 실직이나 소득감소는 저소득층 가정의 급속한 해체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서울 구로구 구로3동. 2.5∼5평짜리 판잣집 1천5백여채가 벌집처럼 모여있는 곳. ‘하루 벌어 하루 먹기’에 바빴지만 ‘잘살아 보겠다’는 희망만은 넘쳐나던 달동네였다.

그러나 IMF 광풍이 온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인적 끊긴 ‘도심속의 폐가’가 현재 1백여채나 된다. 매일 한 두채씩이 을씨년 스러운 빈집으로 변하고 있다.

25일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구로 3동 자신의 집을 찾아온 신모씨(42). 대문 자물쇠가 그대로 잠겨 있는 것을 본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지난 2월 술독에 빠져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자신을 버리고 딸과 함께 집을 나갔던 아내가 돌아와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이 무너져 버린 것.

목수인 그가 술로 하루를 지새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말 건설현장에 불어닥친 불황으로 일감이 없어지면서부터. 견디다 못한 부인은 2월말 초등학생인 딸과 함께 집을 나갔다.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4월초 딸이 전학간 대전의 학교를 알아냈지만 부인과 딸을 찾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돈을 벌어 아내와 딸 앞에 떳떳한 가장으로 서고 싶지만 요즘 같은 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냐”며 혼자 눈물을 삼킬 뿐이다.

옆집 한모씨(35)가정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난 2월 한씨가 구로공단 신발공장에서 실직하면서 가족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다. 모시던 부모는 인천의 여동생에게 보내고 자신은 지방의 건설현장을 찾아나섰다. 부인 심씨도 강원도 강릉의 친척집으로 떠났다.

이곳 구로3동에는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쪽이 가출해 버린 편모 편부가정도 현재 1백여가구가 넘고 ‘시한폭탄’과 같은 가정불화를 겪고 있는 가정도 부지기수다.

24일 오후 4시경. 이모양(13)이 구멍가게에 찾아와 외상으로 막걸리 1병과 소주 1병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갔다. 몇시간 뒤 갑자기 이양 집에서 고함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술을 마신 이양의 아버지는 부인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집 밖으로 도망나온 부인을 쫓아나와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IMF관리체제이후 이런 가정붕괴 조짐은 저소득층만의 현상은 아니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미 화이트칼라를 비롯한 중산층 가정의 파괴도 가속도가 붙는 양상이다.

서울 가정법원에 따르면 협의이혼 신청은 지난해 11월 4백72건에서 올 3월에는 7백84건으로 무려 66%나 늘었다.

최근 서울 가정법원에 협의이혼을 신청한 양모씨(35·여). IMF이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중산층가정의 평범한 주부였다. 소규모 봉제회사의 기술과장인 남편 김모씨(36), 여섯살짜리 아들과 함께 오붓하게 살았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느닷없이 실직한 남편이 새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하게 되자 자포자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매일 친구들을 불러내 대낮부터 술을 먹는 것이 일과가 됐고 집에 오면 “왜 나를 무시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3월말, 술을 먹고 들어온 남편이 “이렇게 살 바에는 다같이 죽어버리자”며 부엌에서 칼을 갖고와 휘둘렀다. 막무가내였다. 남편은 한술 더 떠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들은 내가 죽이겠다”며 자고 있는 아이의 목까지 졸랐다. 그는 결국 이혼을 결심했다.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가족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실직으로 혹은 빚을 갚을 길이 없어 ‘가족동반’으로 극단적인 길을 가는 사례가 자주 보도되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郭培姬·여)부소장은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돈 버는 기계 역할만 하던 남편과 아버지가 실직으로 인해 그 역할을 잃어버리자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며 “실업과 관련한 사회 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현실에서 실직과 소득의 급격한 감소는 수많은 가정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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