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⑨]정부기록 관리

  • 입력 1998년 4월 28일 20시 15분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빈 캐비닛만 남아 있더군요.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어요.”

김영삼(金泳三)정권 출범 초기 당시 홍인길(洪仁吉)수석비서관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5년 뒤. 김영삼전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즈음 총무처(현 행정자치부)산하 정부기록보존소는 청와대에 주요문서를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일부 수석비서관실은 “공문서를 하나도 만들지 않아 넘겨줄 것이 없다”고 둘러댔다.

물러나는 정권이 주요 정책문서들을 공개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받는 일은 기대할 수 없을까. 정책문서를 차기정권에 넘겨 정책참고자료로 삼게 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까.

김전대통령의 결재서류가 남아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책 참고자료로 쓰기에는 함량미달이다. 금융실명제와 같은 중요한 정책의 결재서류마저 8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정책결정자들이 어떤 문제를 두고 고민했는지, 각종 기준은 어떤 논리로 결정됐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80년 ‘서울의 봄’을 짓밟은 신군부의 사령탑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에 관한 기록중 정부기록보존소에 남아 있는 것은 단 두 건. 관인대장과 현판이관 공문뿐이다.

미국을 보자.

1939년 민간주도로 루스벨트대통령도서관이 만들어져 대통령과 참모, 행정부각료 등이 소장한 개인기록물 등을 수집해 소장하기 시작했다.

74년에는 대통령녹취기록물보존법이 만들어져 워터게이트사건 조사 등을 위해 닉슨대통령 관련 기록을 몰수해 관리했다.

78년에는 대통령기록물법을 제정, ‘대통령 관련 기록은 국가가 소유한다’는 원칙을 확정하고 레이건대통령을 시작으로 대통령기록물을 수집해 관리하고 있다. 레이건도서관에는 개인메모는 물론 식단표까지도 보관돼 있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메모조각도 보존대상이라는 것. 정책구상 메모나 결재과정에서 붉은 펜으로 수정된 메모 등 경우에 따라서는 공식문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다.

기록보존은 어떻게 해야 하나. 정부기록보존소 김익한(金翼漢)평가위원은 이렇게 풀이한다.

“정부기록은 전문적인 관리능력을 가진 기구가 통합관리해야 합니다. 또 문서는 가급적 공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국은 물론 유럽연합(EU)이나 일본 등에서도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지금 우리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동떨어진 모습뿐이다. 게다가 조선시대만도 못하다. 서울대 한영우(韓永愚·국사학과)교수의 이야기다.

“조선조 후기에 왕에 관한 기록이 일지형식 등으로 된 것만 해도 네댓가지는 됩니다. 예컨대 정조가 수원행차를 할 때 상차림은 어떠했고 그릇이 몇개나 됐는지까지 상세히 기록으로 남아있어요. 그런데 현대정치사를 연구하려면 정사(正史)라고 할 만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오죽하면 현대사연구가 고대사연구만큼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최근의 기록문화가 조선시대보다도 퇴조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허술한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들은 정부기록의 보존과 공개에 관한 규정을 법률로 정했다. 우리는 행정부의 경우 강제력이 떨어지는 대통령령 국무총리령뿐이다.

행정부의 경우 담당부서에서 문서를 3년간 보관한 뒤 이를 문서전담계나 과로 넘긴다. 여기에서는 문서별로 정해진 기간(1,3,5, 10, 20, 30년 또는 영구) 보관하다가 폐기한다.

영구보존 대상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는 중요정책에 관한 문서중 보존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 등. 이것들은 10년간 부처별로 보관되다가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하도록 돼있다. 그렇지만 ‘끗발없는’ 보존소는 진짜 중요한 기록은 받아오지도 못한다. 보존대상 문서 5백80만권 가운데 현재 38만권(6.6%)밖에 확보하지 못한 실정.

또 미국 등에서는 정책결정관련 문서는 대부분 영구보존되지만 우리나라는 일부만 빼고 대부분을 10년만 보존한다. 심지어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 중 하나인 정승화(鄭昇和)전계엄사령관 체포에 관한 서류도 10년간 보관후 합법적으로 폐기됐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의 정부 기록문화는 보존중심이 아니라 파기중심’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기록의 생산과 보존, 공개 유통에 대한 공무원들의 인식부족도 심각하다. 증권감독원은 이달 1일 투자신탁회사에 관한 업무를 재정경제부로부터 넘겨받으면서 갖은 수모를 당한 끝에 관련 서류를 받아왔다. 분류를 해보니 투신사 주요정책결정에 관한 공문서는 전혀 없었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정부기록이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되고 있어 외환위기 원인 규명작업 등을 할 때 사실확인에만 엄청난 국가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국가기록물 수집업무를 지원할 민간단체인 한국국가기록연구재단 설립준비위원회 안건호(安建鎬)사무국장은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정책결정이나 집행과정에 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보존되어야 담당자가 바뀌더라도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하지 않게 됩니다.”

정부기록은 누구의 것인가. 담당관료들이 자기것처럼 다뤄도 좋은가. 정부기록의 체계적인 관리와 공개는 ‘민주절차의 하나’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행정행위의 결과물인 정부기록은 국민의 소유입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문서조차 국립기록관리청에서 통합관리하고 이를 분류해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김익한위원)

“공개되지 않는 기록은 기록이 아닙니다. 정부기록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후세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한영우교수)

〈천광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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