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태진/미완의 「시모노세키 판결」

  • 입력 1998년 4월 28일 19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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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로운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이 국가배상을 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그간 민간재단 설립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국가배상을 피해보려는 교묘한 계책이었다. 이를 보다 못해 한국정부가 얼마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한국정부가 하겠다는 결정을 내놓기까지 했다. 일본정부에 도덕적 부담감을 안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려는 뜻이었다. 시모노세키 판결은 물론 이와는 무관할 것이지만 한일간의 이른바 과거사 청산에 새로운 바람인 것은 틀림없다.

▼ 韓日과거사 청산 기대감 ▼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를 처음 표명한 것은 1993년 11월7일이었다. 이때 한일 정상회담에 임한 호소카와 총리가 과거 식민지 지배시절에 한국인들에게 한국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강요, 군위안부와 노동자 강제 연행 등 각종 문제를 저지른 것에 대해 가해자로서 반성, 진사(陳謝)를 표했다. 그러나 이런 화해 분위기도 잠시, 2년 뒤인 95년 10월18일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 총리가 한일합방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발언해 양국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바로 뒤이어 고노 외상이 일제 식민통치가 남북분단을 가져왔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기까지 하여 양국관계는 말 그대로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번 시모노세키 판결은 그 이후에 처음 불어온 훈풍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판소 판결이기 때문에 외교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지나가는 바람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시모노세키지부가 판결 근거에서 정부 입장과 민감한 부분을 피해 국가 사죄를 배제한 것이 이미 그런 한계를 느끼게 한다.

한일 양측은 과거사 문제에서 서로 상대방의 태도를 비난해왔다. 한국측은 사과를 되풀이 요구한 반면, 일본측은 도대체 사과를 몇번 해야 하느냐고 역정을 냈다. 한국측이 사과를 거듭 요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일본측의 태도에서 비롯됐다. 앞의 호소카와 총리와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처럼 한번 사과를 해놓고 그것을 뒤집는 발언이 곧 나왔기 때문이다. 반세기 동안 계속된 양국의 과거사 처리의 이러한 교착상태는 엄청난 시간낭비였다. 지금 동아시아에 불어닥친 금융위기의 태풍도 이 낭비와 무관하지 않다.

18세기 동아시아는 경제적으로 유럽과 마찬가지로 번성일로였다. 그러나 유럽이 활발한 국제교역을 통해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키웠던 데 반해 동아시아 삼국은 중국이 조공책봉체제를 고수하는 바람에 국제교역의 필요성이 높아졌는데도 그것을 밀무역 형태에 머물게 했다. 그 멍에가 다음 세기 동서양 역사의 큰 간격을 가져왔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미숙함은 2차 대전 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발전했지만 과거사 문제에서 진정한 반성을 보이지 않아 동아시아 삼국은 진정한 이웃의 유대를 확립하지 못했다. 일본은 그래서 대규모 투자사업을 동남아시아에 가서 벌였다. 이는 우연찮게도 18세기에 중국의 조공책봉체제에 밀려 일본상인들이 동남아시아로 건너갔던 것과 거의 흡사하다. 일본이 주도한 그 동남아시아 경제권역이 지금 아시아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된 것은 웬일인가. 그동안 일본이 한국 중국과 진정한 유대를 확립했더라면 동아시아는 유럽연합(EU)과 같은 보다 튼튼한 경제권역으로 성장해 금융위기의 한파도 닥치지 않았을 것이다.

▼ 日정부 사죄후 새출발을 ▼

이러한 논평에 대해 과거 대동아공영권의 망령을 떠올리는 일본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삼국 국민이 모두 동의하는 건전한 국제관계와 경제교류의 수립이다. 이런 성찰이 있을 때 시모노세키 판결도 역사에 기여하는 신선한 봄바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군위안부문제를 이렇게 동아시아의 미래가 걸린 십자가의 짐이라고 인식할 때 국가사죄까지 담은 판결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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