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혜경씨,등단16년만에 첫 작품집 펴내

  • 입력 1998년 4월 28일 07시 09분


첫 작품집을 내기까지 꼬박 16년이 걸렸다. 최근 ‘그집 앞’(민음사)을 펴낸 소설가 이혜경(38).

작가들마저도 대중매체의 스타들처럼 화려하게 떴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일이 익숙해진 요즘 그의 존재는 신기할 정도다.

“할 수 있으면 글을 안 쓰고 살아보려 했는데 끝내 못 도망간 거죠. 사는 일이나 글 쓰는 것이나 다르지 않은데 20대에는 왜 그게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첫 창작집에 묶인 중단편 9편 중 등단작 ‘우리들의 떨켜’(82년)를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 3년여의 발표작들. 95년 장편소설 ‘길 위의 집’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것이 재기의 신호였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가장 가까운데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 가능하지 않아서’였다. 가장 가까운 것,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모여사는 사람들….

부부라는 이유로 혹은 부모자식간이라는 인연을 앞세워 서로에게 주어서는 안될 상처를 주는 가족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그 ‘집’안에 똬리를 튼 폭력성과 강요된 희생에 대해 그는 낮지만 끈질긴 목소리로 조목조목 따져왔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은 응어리를 푸는 과정이자 진정한 용서의 출발이었다.

‘그집 앞’에 수록된 중단편의 주인공들은 양지보다는 그늘에 앉아 제 존재를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여자(‘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남편과 시어머니앞에서 자꾸만 마음이 닫히는 불모의 자궁을 가진 여자(‘그집앞’), 사기를 당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도 사기꾼에게 종주먹 한번 들이밀지 못하는 심약한 가족(‘우리들의 떨켜’)…. 이혜경은 기꺼이 그들의 어눌한 입이 되려 한다.

“예전에 초상이 나면 대신 울어주는 종을 곡비(哭婢)라고 했다죠. 작가라는 게 결국은 그런 곡비가 아닐지요. 크게 울 수도 없는 사람을 대신하는….”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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