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엄청 올리고 찔끔 내리고

  • 입력 1998년 4월 27일 19시 39분


물가가 이상하다. 환율상승기에 급격히 큰 폭으로 올랐던 생필품가격이 환율하락기에는 서서히 소폭으로 내려가는 비대칭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밀가루와 설탕이다. 밀가루의 경우 작년 12월 이후 세차례에 걸쳐 59.6%나 올랐지만 내린 것은 지난달 단 한차례 그것도 6.5%에 불과했다. 설탕도 68.2% 인상됐다가 최근 5.0%밖에 안내렸다.

작년말 달러가 오르고 국제원자재 가격이 상승할 때 우리는 물가인상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고 판단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달러당 2천원까지 올랐던 환율은 요즈음 1천3백원대에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시 상승했던 일부 국제 원자재 가격도 최근 들어 속속 떨어졌다. 제조업체의 하향적 임금수준도 제품가격의 인하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업체들이 값내리기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내용물의 용량을 줄이는 등의 눈가림 수법으로 값을 올렸던 업체들이 제품내용을 환원하지 않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환율변동에 맞춰 한때 제품가격을 올렸다가 최근 환란 이전보다 낮은 수준으로 값을 내린 양심적인 업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환율과 원자재가격의 하락분을 제품가에 반영하지 않고 있는 대부분의 업체들은 논리적으로 외적 요인과 관계없는 비용까지 소비자에게 전가해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지금 우리의 경제현실은 근로자들의 급여가 대폭 삭감되고 실직자가 대량으로 쏟아지는 어려운 처지에 있다. 이런 때 남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업체가 부당한 이익만을 챙기려 한다면 기업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출고가격이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유통업자들이 가격인하를 도외시하고 있다면 이 또한 상도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기호식품이나 사치성 소비재라면 모르되 밀가루와 설탕 등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반사회적이고 비열한 짓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번 취임사에서 “물가안정 없이는 어떤 경제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며 물가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제시했다. 정부가 면밀하게 조사해 부당한 가격을 고집하고 있는 업체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주어야 하는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실직과 감봉의 고통 속에 있는 많은 국민을 통제 가능한 물가분야에서만이라도 위로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단속에 밀려 마지못해 내리기보다 업자들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과감하게 값을 내린다면 요즘같은 우울한 사회에서 얼마나 신나는 모습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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