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칼럼]박경태/킬링필드에 돋는 「희망의 싹」

  • 입력 1998년 4월 24일 19시 47분


15일 저녁 태국과의 국경지역인 밀림속 조그만 판잣집에서 20세기 공산주의 운동 중 최악의 유혈극을 빚은 킬링필드의 주역 폴 포트가 숨을 거두었다. 캄보디아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적인 앙코르와트를 건설했던 고대 앙코르제국과 2백만명의 동족을 학살한 미증유의 폭력이 자행된 비극의 땅이라는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각인돼 있다.

캄보디아는 서기 802년 앙코르 왕국이 세워진 후 크메르민족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이 왕조가 1431년 태국의 침략으로 쇠퇴하자 태국 베트남 등 주변국가로부터의 침략에 시달렸고 19세기부터는 프랑스 식민치하에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시작됐으며, 이 과정에서 좌익 항프랑스 독립운동이 태동한다.

이처럼 천년에 걸친 고난의 땅에서 자라난 좌익 독립운동 단체인 크메르 루주는 75년 공산혁명을 달성한 후 이상적인 농촌 공산사회 건설이라는 구호아래 한맺힌 들판을 인골로 메우는 대참극을 빚게 된다. 도시는 소개(疏開)되고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처형되거나 농촌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사회기반 시설은 와해되었다. 크메르 루주는 수탈과 침략으로 신음했던 캄보디아에 마지막 일격을 가해 회생하기 어려운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폴 포트의 죽음으로 그가 저지른 끔찍한 죄과에 대한 사법적인 단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폴 포트 외 키우 삼판, 타목 등 여타 킬링필드 주역들에 대한 사법절차가 진행될 가능성은 있지만 역시 크메르 루주에 대한 심판은 역사의 몫으로 돌려졌다. 폴 포트는 이미 오래 전에 크메르 루주 내에서도 실권을 잃은 상태였으며 크메르 루주 자체도 캄보디아 정부군의 계속되는 소탕작전으로 섬멸 위기에 놓여 있어 꽤 오래 전부터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인들의 일상생활에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캄보디아 사람들은 폴 포트의 사망 소식에 깊은 감회에 빠졌다.

대학살 뒤에도 내전에 시달렸던 캄보디아는 93년 유엔 주관의 총선을 거쳐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새 헌법을 통해 캄보디아는 공산주의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었으며 국명도 캄보디아왕국으로 바꾸었다. 7월26일에는 제2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실시된다. 캄보디아 스스로의 힘으로 실시하는 최초의 선거다. 이들은 비극의 역사를 곱새기며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왕국은 연간 1인당 국민소득 3백달러 정도의 최빈국이며 그나마 경제 재정 운영을 국제사회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풍부한 부존자원을 살펴보면 상당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차이나의 젖줄인 메콩강 유역에는 비옥한 농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서부지역의 울창한 삼림은 목재 자원의 보고다. 메콩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산업의 성장 가능성도 눈여겨볼 만하다.

또한 캄보디아정부는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95년 외국인 투자법을 제정했으며 투자청을 설치해 외국인 투자 절차 간소화 등에 힘쓰고 있다. 특히 재무부 내에 한국과 중국의 투자 유치를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하는 등 동북아지역으로부터의 투자유치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혁명도 전쟁도 모두 역사에 묻은 채 프놈펜 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 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도 머지않아 아시아의 용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천년 전 세계사에 빛났던 찬란한 문화국가의 영화를 되찾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박경태<주캄보디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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