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명진/「철학」없는 방송개혁

  • 입력 1998년 4월 22일 19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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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경제 전쟁’에서 ‘패망’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악전고투중인 나라인가. 최소한 우리 일상의 정신적 환경이 돼버린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난해 외환위기가 느닷없이 닥쳤을 때 언론도 정부 못지않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언론이 환경감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국가에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이유다.

▼ 비전 제시할 주체 있어야 ▼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요즈음의 우리 방송은 불안하다. 채널을 막론하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비슷비슷한 애정 갈등 드라마, 연예인들이 모여 신나게 한바탕 노는 게임프로나 신변잡기 토크쇼들이 여전히 주요 시간대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 극복을 위한 시사토론 좌담회는 여전히 추상적 결론만 나열될 뿐 가장 절실한 문제인 외채의 월별 상환액수나 방법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발견할 수 없다. 금모으기 운동도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전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데는 성공했지만 일회성 이벤트로 그쳤을 뿐 동원된 국민 에너지를 몰아 지속적인 생활운동으로 이끌어가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행락객이 늘고 도로에 자동차가 늘었다고 방송이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이 험한 시기를 살아가는데 시청자들도 위안이 필요하다. 전쟁터에서도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은 필수적으로 있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위문공연이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훈련과 정신무장을 앞지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방송사탓만 할 수는 없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국가의 정책과 방송이 조화를 이루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는 주체가 없다. 방송의 주무부서가 해체되었고 방송위원회는 힘없는 규제기구로서 그같은 기능이 부여돼 있지도 않다. 방송의 자유와 독립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한 나라의 제도로서 방송이 가야 할 방향이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다. 특히 원인진단이나 해결책도 간단치 않은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는데다 방송과 관련해서도 세계화 논리와 민족 정체성의 논리, 산업 경쟁력의 논리와 문화 우선의 논리 등 상반되는 입장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어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 상황이다. 국가는 최소한 이같은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방송철학을 정립하고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며칠 전 프랑스방송위원회 위원장이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프랑스방송위원회가 방송의 독립과 민주적 운용을 위해 기울이고 있는 노력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방송 통신 통합 논리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기술적 융합이라는 명분아래 방송을 통신과 똑같은 자유시장 논리로 몰고가서는 안된다는 것, 이같은 논리가 세계통신망을 소유 통제하고 있는 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경계의 메시지를 전하고 ‘동지’를 규합하려 온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세계화는 필요하나 그것이 획일화나 정체성의 포기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방송같은 문화 산업은 여타 산업과 다른 기준에서 시장 개방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문화적 예외’이론은 우루과이라운드 시절부터 여야 좌우를 막론하고 프랑스 방송정책의 근간이 되어온 철학이다. 이런 입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방송정책이 대내외적으로 힘을 가지려면 일관성 있는 철학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 기회였다.

▼ 시장논리 위험성 경계를 ▼

국회는 방송개혁을 위해 노력중이지만 어떤 철학에 기반해서 방송개혁을 시도하고 있는지 감지되는 것이 없다. 방송위원회의 기능이나 구성문제를 둘러싼 갑론을박에서 방송의 민주화와 독립성을 위한 고뇌와 의지는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적 시스템을 온통 바꾸어야 하는 이 시점에서 그것이 필요조건이기는 해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방송위원회는 방송에 자유와 독립성을 부여하고 방송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의 철학적 전략이 필요하다.

박명진<서울대교수·언론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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