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정호/日문화개방 누가 덕보나?

  • 입력 1998년 4월 20일 19시 52분


‘문화’란 말이 남용되고 있다. ‘기업 문화’ ‘교통문화’에서 ‘음주문화’‘쇼핑문화’로까지…. ‘화장실문화’ ‘노래방문화’에서 심지어 ‘폭력문화’ ‘자살문화’로까지….

아무 말에나 ‘문화’란 꼬리말만 달게 되면 ‘문화적’인 향긋한 여운이 풍기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좀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문화’란 꼬리말을 도용함으로써 얼마든지 사람을 오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경우가 ‘일본의 대중 문화’를 둘러싼 논의다.

원래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통상’의 문제, ‘경제’의 문제다.

‘대중문화’란 그 겉옷을 벗긴 알몸뚱이는 예외없이 문화 ‘상품’이다. 일본의 대중문화를 우리나라에서 개방한다는 것은 일본의 CD 음반 비디오 영화 등등 일본 상품에 우리나라의 ‘시장’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일본의 대중 문화 개방 문제를 ‘문화’라는 꼬리말 때문에 당연히 문화 정책당국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부터가 잘못이요 착각이다. 그것은 문화란 꼬리말이 붙었으니 기업문화도 교통문화도 그리고 화장실문화도 모두 다 문화 정책당국의 소관이라고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우스운 착각이다.

한국에 일본의 대중 문화를 개방한다면 그로 해서 누가 혜택을 보는 것일까. 우리가 혜택을 보는 것일까. 우리의 문화가 혜택을 보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오직 일본 것이라면 헌 바지, 헌 신발도 좋다고 덤벼드는 한국의 ‘황금시장’에 눈독을 들여온 일본업자들, 음반 CD 비디오 영화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일본업자들이 재미를 볼 것이요, 그로 해서 한국 시장을 더욱 확대할 수 있게 된 일본측이 혜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일 국교수립 이래 우리는 해마다 누적되는 대일 무역적자를 해소시키기는 커녕 갈수록 증대시켜 오기만 했다. 어느 경제학자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지난 30여년 동안 전세계를 상대로 힘들게 물건을 팔아서 번 돈을, 일본 물건을 사들여 오느라 고스란히 갖다 바치고서도 모자라 빚두루마기가 되고 있는 꼴이다.

한일간의 이 심각한 무역 역조를 시정하기 위한 골백번의 양국간 회의와 협의가 거듭되어도 일본측은 한국엔 사올 만한 물건이 없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동안 한일친선과 교류를 생각하는 일본의 어느 문화단체도, 어느 자선단체도 불쌍한 한국의 ‘상품문화’를 위해 일본 시장을 개방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일 무역적자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오르고 있고, 외채가 2천억 달러에 육박해 국가부도위기에 몰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하필 이 마당에 일본의 대중문화상품 수입을 위해서 누가 시키지도 조르지도 않는 터에 우리 스스로 먼저 나서 빗장을 풀고 시장을 활짝 개방한다? 그게 잘하는 일인가.

일본은 계속 ‘독도’는 ‘다케시마(竹島)’라 고집하고 있고, 어업협정은 일방적으로 파기해놓고 있고, ‘군대위안부’는 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어떤 국가적 사과도 배상도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터에 우리는 내 줄 것 다 내주고 열어 줄 것 다 열어 주면서 손에 아무런 ‘카드’도 쥐지 못한 빈털터리로 앞으로 일본과 무슨 협상을 하고 무슨 교섭을 한단 말인가. 수십조원의 빚더미를 안게 된 고속전철사업을 프랑스에 내주고 나서야 외규장각 도서 반환 교섭을 벌이는 어리석음을 또 되풀이하겠다는 말인가.

그래도 한군데 믿음직스러운 데가 있다. 일본의 대중문화개방은 “우리가 먼저 얘기를 꺼낼 이유가 없는 사안”이라고 논평한 외교통상부의 입장이다.

최정호(연세대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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