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세대 현주소]실력으로 재무장 「희망」되살려

  • 입력 1998년 4월 20일 19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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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다. 모래시계를 아예 다시 뒤집어놓는거야.’

대학시절엔 최루탄연기를, 사회에선 IMF찬서리를 뒤집어쓴, 그래서 회한이 특히 많다는 ‘모래시계 세대’.

하지만 이미 한움큼 모래알이 빠져나간 모래시계를 바라보며 한숨만 쉬지는 않는다. 치열하게 젊음을 불살랐던 세대답게 새 희망을 일궈가는 그들의 젊은 오늘.

▼ 새출발 ▼

연봉 6천만원을 받는다는 K사 김정근과장(34).지난해말부터 한의대 진학을 목표로 밤마다 수능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다.“불안하고 경쟁만을 강요하는 월급쟁이 생활을 벗어나 대학시절부터의 꿈이었던 지역봉사활동과 동양철학 공부를 하고 싶어 결단을 내렸다.”

물론 지금의 40, 50대가 30대일 때도 인생항로를 바꾸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모래시계 세대에선 그 숫자가 예전세대와 비교도 안될 만큼 늘었다. 서울 신림동 한 고시학원 최모원장. “점점 30대 수강생이 늘어 요즘은 전체의 반을 넘는다.” 실제로 사법시험합격자중 30대의 비율은 86년 14%에서 95년에는 23%로 늘어났다.

숫자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새 양상이 두드러진다. 비록 실직에 따른 강요된 새출발일지라도 ‘밥벌이’에 대한 집착보다는 ‘못다이룬 이상(理想)’을 추구하려는 적극적 의지가 강하다.

동성화학 회장비서실 오현석씨(32). 촉망받는 엘리트사원이었던 그는 20일 자진 퇴사했다. “회사에 불만이 있거나 전망이 어두웠던 건 아니다”는 그의 1차 목표는 공인회계사 자격 취득. 경제적 자립기반을 마련한 뒤 대학시절부터 꿈꿔온 정치개혁에 헌신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80년대 대학가의 필독서였던 ‘철학에세이’(동녘 출판부 지음)의 숨은 저자였던 조성오씨(서울대법대 77학번)도 지난해말 사법시험에 합격,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창업도 러시를 이룬다. 인터넷프로그램개발 온라인쇼핑 데이터뱅크 전자광고업…. 자본보다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분야마다 모래시계 세대가 퍼져나간다. 심지어 부동산업에 진출한 학생운동권 출신도 수십명이다.

이미 30대 중반을 달리는 나이에 다시 출발선에 선 그들. 하지만 걱정보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 식지 않은 가슴 ▼

저항세대였던 80년대 학번. 기업이나 행정부 등 제도권 조직에서 의외로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일단 많다. H사 조모이사. “80년대 초중반 학번 사원들이 처음엔 사무직노조결성 등에 적극적이어서 곤혹스러웠지만 회사경력이 쌓이면서 우수한 능력과 성실성을 발휘하고 있다.”

94년말 이후 핵심운동권 출신 50여명을 특채한 대우그룹 관계자도 “운동권출신은 민주적 사고방식과 조직원에게 필요한 우수한 자질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다”고 전한다.

하지만 ‘모래시계 세대의 진짜 주인공들’, 즉 핵심운동권은 아니었을지언정 숱한 고뇌의 밤을 새우며 시위대의 머릿수를 채웠던 ‘이름없는 그들’은 이미 삶의 다양한 영역속에서 ‘희망의 싹’을 키워가고 있다.

휴일이면 두 자녀를 데리고 경기 곤지암에 있는 3평짜리 가족농장(1년 이용료 3만원)에 가 고추 상추 고구마를 심는다는 LG그룹 황모과장(37). “개발만능주의, 경쟁제일주의가 독주했던 시절에 젊음을 보냈던 윗세대와 달리 우리 세대는 ‘함께 사는 세상의 소중함’을 많이 배웠지요. 제 아이들이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을 보살필 줄 알고 하찮은 작은 생명체도 소중히 여기는 자연친화적인 가치관을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겁니다.”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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