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⑤]국제회계기준 IAS

  • 입력 1998년 4월 14일 19시 16분


한 외국계은행은 정부가 매각을 추진중인 서울은행과 제일은행 인수여부를 깊숙이 검토하다 포기했다. 이 은행 임원은 “예상했던 것보다 회계장부에 기재된 부실채권이 훨씬 적었다”며 “어디엔가 부실덩어리가 감춰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인수검토를 중단했다”고 털어놓았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작년 하반기 국내 모 백화점을 인수하기 위해 이 백화점의 재무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 회계장부 곳곳에 숨겨져있던 부채를 발견한 순간 인수계획은 백지화됐다.

국내기업의 부실회계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도 홍수 속에서 화의신청서 등을 작성해주느라 국내 1백50여개 기업의 실체를 들여다보게된 모 변호사는 “엉터리 회계의 역사는 기업의 역사와 같다고 보면 된다”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역사가 40년인 기업은 40년간, 20년인 기업은 20년간 거짓 회계를 해왔다는 충격적인 현장고발이다. 이 변호사는 “회계보고서를 믿고 있다가 기업이 쓰러진 뒤에야 ‘이런줄 몰랐다’고 탄식하는 기업 오너도 많이 보았다”고 말했다.

얼굴에 분(粉)칠을 하듯 ‘썩은’ 기업을 멀쩡한 것처럼 치장해놓는 분식(粉飾)결산. 이런 수법이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 계기는 작년의 부도 도미노였다. 업계 관계자의 말.

“화장술 덕택에 건강한듯 보였던 기업들이 외환금융위기에 마구 쓰러지면서 그 실체가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국제통화기금(IMF)이란 빗줄기가 화장을 지웠기 때문일까. 한국 기업의 감사보고서는 국내외에서 휴지조각 취급을 받게됐다. 이젠 그 보고서를 그대로 믿고 돈을 빌려주는 해외 금융기관은 하나도 없다.

국내기업들 사이에 회계감사는 ‘통과의례’로 여겨졌다. 삼일회계법인 김일섭(金一燮)부회장은 “30년간 회계사 활동을 하면서 ‘회계가 중요하다’는 말은 IMF사태가 터진 뒤 처음 들었다”고 토로했다. 경영을 감시해야 하는 회계감사를 경영의 보조수단쯤으로 여겼던 것.

회계감사는 ‘고무도장’으로도 불렸다. 대주주나 기업경영진이 부채나 이익규모를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해놓은 것에 회계사는 무조건 OK도장을 찍는다는 의미.

S회계법인 공인회계사 L씨는 “작년까지는 회계사들이 은행 감사를 가장 꺼렸다”며 “회계장부도 보여주지 않고 적정(適正)판정을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은행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적정이란 회계가 기준에 맞게 작성됐으므로 보고서 상의 수치를 믿어도 좋다는 의미다.

이런 사례들은 ‘회계는 소금’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크게 어긋난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한국적 회계의 차이는 감사인 선임을 누가 하느냐에 달려있다. 증권감독원 최진영(崔秦榮·공인회계사)과장의 설명.

“미국 등의 경우 경영결과에 대한 회계감사가 철저합니다. 주주가 경영진을 감시 감독하기 위해서 감사를 하기 때문이지요. 한국과 일본은 기업비밀이 외부에 누설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경영진 또는 오너가 직접 감사인을 지정하는 바람에 부실감사가 생깁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선 잘못된 회계감사에 대한 책임추궁도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엉터리 회계와 감사가 많았다.

부실회계로 인한 폐해는 상상외로 크다. 금융기관은 엉터리자료에 따라 부실대출을, 주식투자자는 헛다리 투자를 한다. 정부는 엉터리 기업 통계를 놓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편다. 한 회계사는 “만약 한보철강을 제대로 회계감사했더라면 한보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한국의 회계현실은 ‘국내 회계시장의 미국지배’를 한걸음씩 불러들이고 있다. 잘못된 로컬 스탠더드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의해 장악되는 상황이다.

주택은행과 보람은행은 97년도 회계감사를 이른바 세계의 ‘빅6 회계법인’인 쿠퍼스&라이브런드(C&L)와 KPMG에 각각 의뢰했다. 아직은 국내시장이 개방되지 않아 감사는 이들의 국내 멤버법인(일종의 제휴법인)이 맡아 했다. 이 감사에선 은행감독원 규정 등 국내기준이 아닌 미국 회계기준이 적용됐다. 감사결과를 미국 회계사 2명이 상주하면서 일일이 재검토했다. 해외에 배포된 이들 은행의 감사보고서에도 외국회계법인의 서명이 들어있다. 그래야만 외국에서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일본 야마이치(山一)증권 도산 이후 미국과 영국은 일본 기업의 회계장부에도 불신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계속 흑자를 내던이증권사가하루아침에 도산하자 영국의파이낸셜타임스지는‘불가사의한 나라의 회계감사(wonderland accounting)’라고 사설에서 꼬집었다. 일본 회계장부가 국제시장에서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회계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회계시장을 주도하는 영미계(英美系) 빅6는 올가을까지 국제회계기준(International Accounting Standards·IAS)의 주요 항목을 만들 계획. 회계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명문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빅6는 또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멤버법인을 자신들과 통합하는 작업을 1∼2년내에 완료할 계획이다.

가령 C&L과 업무제휴한 한국의 삼일회계법인은 앞으로 C&L의 한국 현지법인으로 흡수된다. 그 파급효과에 대해 삼일회계법인 안영균(安英均)상무는 이렇게 설명했다.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기업이라면 빅6가 만든 규정에 따라 회계장부를 작성해야 하고 빅6의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분식결산은 불가능하게 되는 거죠. 빅6로부터 적정판정을 받지 못한 기업은 국제금융시장에 발을 붙이질 못합니다. 빅6가 전세계 대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갖게된다는 의미입니다.”

〈이희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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