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동포의 오늘③]『南이 살기가 낫다지요』

  • 입력 1998년 4월 14일 08시 09분


분단은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겨놓고 있었다. 남과 북 중에서 나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고 국적(國籍)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가 예전보다 훨씬 엷어졌지만 그들은 거꾸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혼란스러운 싸움 속에 던져져 있었다.

3월2일. 취재진은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북쪽으로 20㎞쯤 떨어진 사라루스코에 살고 있는 현순녀(玄順女·72·여)씨의 집을 찾았다.

현씨는 마침 김치를 담그고 있다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 우리를 황망히 맞았다. 그의 안내로 거실에 들어섰을 때 입구에 흩어져 있는 몇장의 노동신문과 김정일(金正日)어록집이 선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현씨는 법적으로는 ‘북조선’국민이다. 냉전 시절, 옛 소련이 북한하고만 국교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은 물론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북조선 국적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러시아로 국적을 바꾸거나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가 되기도 했지만 현씨는 그냥 북한국민으로 남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북한의 해외공민이다. 우리로 치면 한국국적을 갖고 외국에 나가 사는 해외동포에 해당된다. 현씨의 설명이다.

“저는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조선을 떠났던 부모님들의 고향이 함경남도거든요. 또 두 남매도 60년대에 북조선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계속 북조선공화국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북에 유학간 그의 아들은 83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떴지만 홀로 된 며느리가 4명의 손자 손녀들을 키우며 지금도 원산에서 살고 있다. 딸(51)은 평안남도 평성에서 살고 있다.

현씨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내 조국은 북조선”이라는 그의 말과 표정에서 한 점 저어함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동행한 이토기자가 현씨에게 김정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현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북조선의 대통령이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요. 남쪽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존경하듯 존경해야 합니다. 러시아에서도 옐친을 다 욕하면서도 대통령이니까 한편으로는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습니까.”

이토기자가 “일본에서는 김일성(金日成)부자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다”고 하자 현씨의 답변은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김일성장군님은 빨치산으로 고생을 많이 한 분입니다. 그건 확실한 역사입니다. 북조선 책도, 일본 책도 많이 봤지만 다 그렇게 씌어 있어요. 그 많은 책들이 다 거짓말을 썼겠습니까. 카터도 김일성의 인상이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김정일에 대해선 잘 몰라요.”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현씨는 북한정부측의 자료와 홍보물 등에 나타난 내용들을 그대로 믿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일본에서 출간된 김정숙(金正淑·김일성의 첫 부인)전기를 직접 가져다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현씨는 한국의 발전상을 알고 있었다.

“생활수준이야 남조선쪽이 낫지요. 북은 3년간 큰물(홍수)이 나는 바람에 식량문제로 고생이 심해요. 그래도 자기 제도를 사랑해야지요. 북이 갑자기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기자는 그에게 남과 북 어느 제도로 통일되는 게 바람직한지를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저 어떻게 타합(타협)해서 잘되길 바라지. 우리 같은 게 뭘 아나요. 아무튼 남이나 북이나 한 나무의 한 가지이고 같은 동포 아닙니까. 작은 땅에서….”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만난 정성룡(鄭成龍·73)씨도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북한 국적자. 1931년 여섯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사할린에 왔다는 그는 북한이 89년 12월29일 발행한 ‘해외공민증’을 보여 주며 입을 열었다.

“처(이점출·李占出·72)는 경북 봉화가 고향이에요. 그래서 한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재작년 무국적자로 국적을 바꾸고 두번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저도 한국에 가고 싶어 러시아로 국적을 바꾸기 위해 나홋카에 있는 북한총영사관에 국적변경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지요.”

옆에 있던 우리측 통역이 “공민증을 우편으로 총영사관에 보내고 증빙서류와 함께 러시아에 국적변경을 신청하면 된다”고 조언하자 그는 “그런 방법이 있느냐”며 반색을 했다.

그는 현씨와 달리 북한에 대한 귀속감이나 국가애가 상대적으로 약해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북한 방문과 아내의 남한방문에 대한 비교 평가에서 오는 듯했다.

“78년과 86년 두 차례 북조선을 가보았는데 생각보다 못했습니다. 친척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다 바빴고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여러모로 사할린보다 안좋아 보였습니다. 처가 한국에 갔다 와서는 정말 좋았다고 하더군요. 한국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가서 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정씨는 “북조선 국적이지만 한국도 조국이라고 생각한다”며 “북조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가서 뭐 하겠느냐”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유주노사할린스크 민속예술학교에서 한국춤과 장구 등을 가르치는 이정아씨(51·여)는 러시아가 국적. 그는 남한의 충남 부여 출신임에도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해 더 친근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북한을 다섯 차례, 남한을 두 차례 방문했지요. 그러나 어릴 때 이곳 조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때문인지 아무래도 북쪽이 더 가깝게 느껴지더군요. 처음 북한 땅을 밟았을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했지요.”

그가 말한 조선학교는 북한의 후원으로 47년부터 63년까지 사할린 거주 한인들에게 조선말과 조선역사를 가르쳤던 곳. 상당수 한인 2세들이 이곳에서 북한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조선학교는 흐루시초프 집권 때 폐교됐는데 이 바람에 한인 2,3세들 중에는 한국말과 글을 체계적으로 접해 볼 기회를 놓친 사람들도 많다.

이씨는 서로 스타일이 다른 남과 북의 무용만 하더라도 북한쪽이 더 전통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의 강한 북한식 억양은 예술을 하는 사람다운 곱상한 용모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서울에 가서 젊은 여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참 고와서 듣기 좋아요. 그런데 제 말투는 좀 억세죠. 어떤 때는 나도 곱게 말하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북이나 남이나 좋은 것만 가져다 사할린에 심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남과 북을 굳이 가리려 하지 않아요.”

사할린에 거주하는 3만5천∼3만6천여명의 한인 중 북한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5백명가량이라고 한인회 관계자들은 전했다. 과거에는 그 비율이 더 높았지만 한국의 발전상이 알려지고 한국방문길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북한국적을 포기, 현재는 북한에 가족 친지들이 있는 사람들만 북한국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한인회의 한 관계자는 “북한국적자가 오히려 다른 한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어서 빨리 통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주노사할린스크〓한기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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