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지명관/「국민의 정부」로 가는 길

  • 입력 1998년 4월 12일 20시 31분


4·19 38주년이 다가온다. 한 시대가 지니는 의미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4·19는 분명히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국민적인 투쟁이었고 승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적인 투쟁은 아니었다고 해도 하나의 정권을 타도했다는 정치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다음해 61년에는 5·16군사쿠데타로 모정권이 무너지고 말았다.

▼ 여야 적대감 해소가 우선 ▼

이러한 정치적인 비극이 되풀이되면서 우리나라 정치사란 여당과 야당은 있어도 거기에는 적대관계가 도사리고 있었고 극한적인 대립속에서 집권세력이란 야당이나 비판적인 국민의 눈에는 타도되어야 할 것으로 비춰지기 쉬웠다.

김대중정권이 탄생한 지 이제 막 2개월을 맞이하려고 한다. 이 정권은 스스로 ‘국민의 정부’라고 하고 있지만 정말 그러한 자각을 계속한다면 커다란 정치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것은 4·19 이후, 아니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치사를 지배해온 적대관계를 청산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냉전 이후 서로가 적이 아니라 하나의 배를 탄 승객이라는 오늘의 세계사적 흐름과도 호흡을 함께 하는 일이다. 정부란 어느 한 계급이나 집단 또는 지역을 대표하고 다른 쪽을 억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거기서는 야당이나 반대하는 정치세력도 체제의 변혁, 집권세력의 타도 같은 것은 꿈꾸지 않는다. 모두가 한 체제 안에서 민주적인 대화, 개량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나라를 유지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유럽 정치사에서는 이러한 정치체제에 도달했을 때 그것을 ‘사회국가’ 또는 ‘시민사회’라고 했고 ‘복지사회’라고도 했다. 오늘 우리 정치현실에서 여야가 아직도 심하게 대립 충돌하는 것은 지난날의 극한적인 정치가 낳은 후유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야간에 폭력 없이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여당도 야당도 적대관계가 아니라 한 체제 안에서 민주적인 대화를 나눈 경험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 민주주의 틀 안에서의 여당의 경험도 야당의 경험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정권을 잃으면 여당도 해체의 운명을 밟는 것이 아닌가.

민주적인 정권교체로 여당이 출현했다면 이번에는 지난날의 여당이 민주적인 야당이 되고 언젠가는 여야 사이에 다시 정권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민주주의가 공고한 기반을 다지게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역사는 오늘을 정말 ‘국민의 정부’시대였다고 기록하는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뜻에서 여야는 민주적인 반성에서 곧 원점으로 돌아가 김종필총리서리 문제를 국회 안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김대중대통령으로서는 김종필총리서리 지명이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겠다. 선거공약이나 선거에서의 공로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라면 이른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사이에 연대를 도출해내야 하고 지난날의 적대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오늘의 난국이나 대북관계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정말 이 나라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그러한 대정치가 요구된다. 그것은 결코 정치세력 사이의 연합이나 야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해묵은 상처를 치유하고 ‘한겨레 한마음’을 되찾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라고 보아야 한다.

▼ 총리문제 국회서 매듭을 ▼

그리고 야당이 총리 인준에 있어서 각 개인의 정치적 소신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된다면 당내 민주주의의 실천이라는 또하나의 커다란 민주적인 전진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38년전 4·19에 꽃잎처럼 떨어져간 젊음들의 한을 되새기면서 여야는 모든 응어리를 툭툭 털고 새로운 결단으로 오늘의 정국을 풀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지명관 <한림대 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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