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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아일랜드 협정타결 배경]「권력공유보장」명문화 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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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아일랜드 협정타결 배경]「권력공유보장」명문화 실마리

입력 1998-04-11 08:04수정 2009-09-2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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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이 10일 타결됨으로써 30년째 계속되던 북아일랜드 개신교와 가톨릭계의 지루한 유혈사태가 일단락됐다.

이로써 3천2백여명의 희생자를 낳으며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던 ‘증오의 땅’ 북아일랜드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영향력이 반반씩 섞인 자치국가 형태로 평화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디뎠다.

미국의 조지 미첼 전상원의원의 중재로 작년 6월 본격화한 8개 정파간 협상은 신구교계의 주도권 다툼 때문에 난항을 겪어왔다.

양측의 갈등이 심한 것은 분쟁이 4백년전부터 시작됐기 때문. 17세기 초 영국정부의 후원하에 개신교도들이 대거 아일랜드 북부로 이주하면서 갈등의 씨가 뿌려졌다. 1801년에는 아일랜드섬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그러나 가톨릭을 국교로 믿어오던 아일랜드인들은 개신교도들을 순순히 용인할 수가 없었다.

결국 1919년경부터 아일랜드인들의 독립투쟁이 가열됐고 3년 뒤인 1922년 아일랜드는 남북으로 분단됐다. 비옥한 북부 6개지방은 영국 통치하에 남고 남부 26개 지방은 아일랜드공화국으로 독립을 얻은 것.

그러나 북아일랜드에는 불씨가 남았다. 정치 경제 치안의 주도권을 잡은 개신교가 가톨릭계를 차별하게 된 것. 1969년 가톨릭계 주민들의 폭동은 유혈사태의 서곡이었다.

이후 자고나면 벌어지는 북아일랜드의 유혈분쟁은 아일랜드 영국인은 물론 관심있는 외국인들마저 넌더리를 낼 정도였다.

역사적 인연때문에 북아일랜드의 개신교계는 ‘우리는 영국인이며 북아일랜드는 영국 땅’이라는 인식이 뿌리깊다. 이번 협상에서도 개신교계 정파들은 계속 영국령으로 남을 수 있는 협정안을, 가톨릭계 정파들은 언젠가는 아일랜드공화국과 통일할 수 있는 안을 원했다. 북아일랜드의 앞날이 영국과 아일랜드 어디로 기울 것인지가 협상의 최대 쟁점이었다.

평화협정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대표로 구성하는 남북아일랜드평의회를 출범시켜 남북아일랜드의 연결고리를 마련하되 영국의 영향력을 상당부분 남기기로 하는 선에서 맺어졌다.

북아일랜드의 개신교계 인구는 54%. 가톨릭계는 43%로 상대적인 소수. 인구 열세를 절감하고 있는 가톨릭계의 의구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권력공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내용도 협정에 포함됐다.

영국의 북아일랜드 지배 종식을 요구하며 무력투쟁을 주도해온 아일랜드공화군(IRA)의 정치조직인 신페인당도 개신교계가 장악해온 경찰조직을 개혁하고 통일주의자들을 석방키로 한 것을 일단 큰 진전으로 판단, 협정체결을 수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워낙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협정이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실행된다고 판단하면 어느 정파에서든 반발할 우려가 있어 북아일랜드의 평화는 현재로서는 조마조마한 상황. 관측통들은 이때문에 평화를 향한 첫 걸음이 ‘평화의 21세기’로 향하는 당당한 행진이 될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윤희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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