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④]美 사외이사회,정책결정 주도

  • 입력 1998년 4월 10일 10시 53분


지난달 30일 현대자동차 이사회.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미국식 이사회의 진용을 갖추고 연 첫 이사회였기 때문.

교수 2명과 법률사무소소장 등 3명의 사외(社外)이사가 자리를 잡았다. 출자기업측 인사 4명도 함께했다. 경영에 참여하는 집행임원은 3명뿐. 이날 이사회는 대표이사 선임안을 만장일치로 처리하고 간단하게 끝났지만 현대자동차 역사엔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동안의 이사회는 임원회의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 직함을 가진 경영진 70명이 참석해 안건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했으니까요. 반대의견은 한번도 없었지요. 이미 모든 것이 회장 주재하에 결정이 된 상태였거든요. 이사회의 비판 감시기능은 웃기는 얘기였지요. 이번에 우리는 이사회다운 이사회를 처음 해봤습니다. 아직은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지만….”(현대자동차 관계자)

재벌그룹회장의 파워가 급격히 위축되고 회장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이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등 변화도 함께 나타났다. 그룹내에서 황제로 군림해온 회장은 계열사 대표이사로 탈바꿈해 이사회를 주재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유승민(劉承旻)연구위원은 “그동안 이사회를 말살해온 재벌의 횡포가 경제위기 상황을 불러오는데 한몫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세계 수준의 이사회를 닮아가기 위해 대기업들이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고 평가했다.

종전에 기업들은 이사회를 제대로 열지도 않았다. ‘서면(書面)이사회’라는 형식을 통해 서류를 돌려 도장을 받거나 회사에서 알아서 도장을 찍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이사들의 도장을 한곳에 보관하는 회사도 많다.

재계관계자는 “삼성의 자동차사업 투자 여부도 이사회에서 활발히 논의됐더라면 현재와 같은 과잉투자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테고 대안도 많이 나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이사회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미국식 이사회 제도. 30∼40년동안 다듬어진 것이다. 사외이사제도를 도입, 이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경영감시와 정책결정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가 상장기업에 의무적으로 사외이사를 두도록 한 것은 60년이었다. 79년부터는 사외이사만으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를 이사회 내에 설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식상장을 못했다.

이사는 10∼20명 규모. 그중 80%는 사외이사이며 최고경영자(Chief Executive Officer·CEO)와 집행임원(Chief Operation Officer·COO) 등 극히 일부(보통 3명)만이 이사다.

겉모습을 보면 요즘 한국의 대기업 이사회도 비슷해졌다. 그러나 이사회 운영방식이나 실질적인 기능과 역할을 보면 우리의 갈길은 멀다.

경영을 잘못하는 CEO는 쫓겨난다. 경영권 암투를 다룬 미국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통신회사 AT&T의 존 월터사장은 전격 영입된 지 8개월만에, 컴퓨터회사 애플사의 길버트 아멜리오회장은 1년여만에 자리를 내놓았다. 사외이사들이 부실경영 책임을 물어 과감하게 CEO를 교체해 버린 것.

LG경제연구원의 류현(柳賢)연구원은 “이런 일은 현재 우리로선 상상하기도 어렵다”며 “미국의 경우 이사회내에 경영진과 완전 독립된 소위원회가 중요기능을 맡고 있어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주로 사외이사로 구성되는 감사위원회와 지명위원회가 미국식 이사회의 핵심. 감사위원회는 회사의 정책과 영업을 감시한다. 지명위원회는 이사 후보를 선정,주총에 추천한다.

한국 대기업의 이사회는 대주주가 이사 후보를 선정한다. 이런 이사들이 경영진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사외이사제도가 의무화됐지만 최근 선임된 6백67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18%가 대주주와 관계가 있거나 전직임원.

또 전체의 70%가 경영실무를 잘 모르는 비전문가들이다. 결국 집행임원들을 견제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은행 등의 사외이사들이 중요안건을 다룰 때 적합한 절차 및 의사록 작성 등 투명한 처리를 요구하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점.

미국에선 주식투자를 많이 하는 캘리포니아공직자퇴직연금 등에서 각 기업의 이사회가 경영감시를 제대로 해냈는지 성적을 매긴다. 미국 비즈니스위크지 같은 경제전문지도 이사회를 평가한다. 점수가 나쁜 사람은 좋은 회사에 이사로 선임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재미있는 것은 비즈니스위크 조사 결과 이사회운영 성적이 각각 6,7위인 미국 3대 자동차회사인 크라이슬러와 GM의 시장부가가치(Market Value Added·MVA)순위는 각각 2백위와 2천위. GM은 원칙대로 CEO와 이사회의장을 분리시킨 반면 크라이슬러는 이 두 자리를 겸임시켜 경영위기 타개에 나선 것. 운영방식엔 왕도(王道)가 없다는 의미다.

한국의 이사회 운영도 마찬가지다. 최대 과제는 세계표준의 이사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이사회의 감시 견제기능을 살리고 투명한 정책결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게 급선무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어떻게 수용해 운영하는지의 선택은 각 기업들의 몫이다.

〈박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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