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우화집「당신의 마음…」,닫힌 가슴 활짝 열어

  • 입력 1998년 4월 10일 0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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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패’입니다. 내 얼굴은 모과처럼 참 못생겼지요. 눈물을 질질 짜기도 하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술 담배도 잘 하지요. 단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지요.

나는 실패인 나 자신을 쳐다보기도 싫답니다.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날들이지요. 도대체 나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답니다. 세상에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이가 또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는 어느날 나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게 싫어 그냥 나 혼자 조용히 썩어가기로 했습니다.

나는 내 얼굴처럼 못생긴 모과가 되어 어느 집 응접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썩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썩어간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죽이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내 영혼마저도 하루속히 썩어 사라질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하더군요. 썩어가는 내 몸에서 참 좋은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얘, 이 모과향 정말 좋다. 어디서 났니? 난 이런 은은한 향이 좋아.”

참으로 뜻밖이었어요. 썩어가는 내 몸에서 향기가 난다! 나는 그때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얘야,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실패에는 성공의 향기가 있단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던 시인 정호승. 그가 펴낸 삶을 위한 우화집 ‘당신의 마음에 창을 달아드립니다’(해냄). 일흔다섯 개의 작고도 큰 이야기들이 담겼다. 그의 산문은 시와는 사뭇 다르다. ‘절망으로 절망을 찔러 희망의 싹을 틔워온’ 그의 시. 그와 달리 이번 글들은 그의 마음씨 만큼이나 순하고 말갛게 풀려 있다.

허기지고 갈 곳이 없어 삶의 모퉁이에서 서성이는 이들. 낮은 데 사는 이들의 시리고 아린 삶에 따뜻한 체온과 시선을 나누어 온 시인. 그는 아직도 ‘눈사람을 기다리며,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래’를 부르는 맹인가수 부부가 눈에 밟히는 걸까.

그는 지하 7백m의 막장에서 도시락을 챙겨 먹는 광원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들려준다. “제 소원요? 그건 물론 땅위의 직업을 갖는 거지요.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직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몰라요….”

그러면서 그는 삶의 갈피갈피에서, 꽉 움켜쥔 채 놓을줄 모르는 손아귀를 조금은 풀어 놓으라고 다독거린다. 유채꽃이 바람을 타고 흐르듯이 그렇게. 바람에 온몸을 맡겨야 꺾이지 않는 자연의 지혜를 나지막이 들려준다.

‘향기는 멀리 간다고, 오래 간다고 해서 좋은 건 아냐. 향기란 어쩌면,살짝 스쳐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존재하는 거야. 향기가 사라지지 않으면 그건 냄새에 불과할지도 몰라….’

울퉁불퉁한 화산석으로 밭둑을 쌓던 제주의 농부. 돌 모서리를 다듬어 아무리 반듯하게 쌓아도 바람에 무너지기만 하는 돌담. 불현듯 뭔가 깨달은 농부는 중얼거린다. “너무 완벽하면 무너지는군. 구멍이 숭숭 나도록 그렇게 좀 허술한 구석이 있어야 하는군….”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 탓일까.어쩌면 삶의 체관(諦觀) 같기도 한, 종교적인 체취가 느껴지는 그 무엇이 언뜻언뜻 비친다. 벼랑 끝에서도 절망과 타협하지 않던 그의 시는 산문에서 일시에 무너지듯, 그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듯.

남편이 죽었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여름휴가 때 첫아들을 안고 고향의 바닷가를 찾자고 하던 말만 떠올랐다. 그녀는 임신중이었다.

다니던 성당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해산을 했다. 남편이 바라던대로 아들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았다. 동해가 보이는 산자락에 남편이 잠들어 있었다. 파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편을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산에서 내려오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불렀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왜 성당에 가지 않느냐?”

“나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요.”

그녀가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이 글썽해지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꽃밭으로 데려갔다. 꽃밭에는 장미와 달리아, 채송화와 도라지꽃 등이 활짝 피어 있었다.

“여기에서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보거라.” 시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말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단다….”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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