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③]株主 자본주의

  • 입력 1998년 4월 7일 19시 30분


“삼성자동차에 우회지원을 함으로써 삼성전자 주주들이 피해를 볼 우려가 있는데 어떻게 할거냐. 해외 현지법인의 부실경영 책임을 져라. 삼성전자에서 월급받는 사람이 삼성그룹에서 일을 하는 건 어떻게 된거냐, 명단을 내놓아라.”

3월27일 국내 최대 제조업체인 삼성전자의 주주총회는 무려 13시간이나 계속됐다. 작년까지의 주총에선 전혀 들을 수 없던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공격측은 ‘소액주주 운동’을 벌이고 있는 참여연대, 수비측은 회계사 변호사 등까지 동원해 놓은 경영진.

의장인 윤종용(尹鍾龍)사장이 “이의 없습니까”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참여연대측의 장하성(張夏成)고려대교수와 박원순(朴元淳)변호사 등은 “이의 있습니다”를 외쳐댄다. 윤사장이 ‘일괄처리’를 주문하면 장교수는 ‘건별심의’를 주장한다.

소액주주들은 비밀자료까지 확보해 놓고 철저한 분석을 토대로 추궁해댔다. 장교수 등이 의결권을 위임받은 주식은 불과 1%. 예년 같으면 주총에서 발언권 한번 얻기 어려운 ‘잠자는’ 지분이었다.

소액주주의 권리의식은 단순히 ‘따지기’ 차원을 넘어 경영참여를 시도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중견 식기제조업체인 대림통상이 그 예.

이 회사 주총을 앞두고 백광훈(白光薰)씨 등 소액주주들은 표를 모아 이사회 진출을 위한 표대결을 선언했다. 회사측은 주총에서 “위임장 일부에 인감이 없다”며 의결권을 모두 인정하지 않고 맞섰다. 소액주주의 경영 진출은 일단 무위로 그쳤지만 주장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다.

소액주주들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진다. 회사의 주인은 일부 대주주나 임직원이 아닌 모든 주주라는 의식, 즉 ‘주주자본주의’가 한국에도 상륙한 것이다.

주주자본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미국의 경우 기업 경영진이 가장 중시하는 경영지표는 물건을 많이 팔고 순이익을 많이 내는 것이 아니다. 주주에 대한 배당이나 시세차익을 확보해주고 세금을 최대한 적게 내서 주주에게 금전적 혜택을 많이 안겨주는 것이다. 바로 ‘주주가치’다. 기업의 연례보고서에도 이 수치가 실려 경영평가의 기초자료로 쓰인다. 주주자본주의는 바로 주주를 위한 경영인 것이다.

미국에선 ‘주주행동주의’로 발전하는 추세다. 연기금이나 투자회사들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거나 경영진 교체도 서슴지 않는다.

주주자본주의는 종업원자본주의나 은행자본주의를 누르고 글로벌 스탠더드로 떠올랐다. 한국의 재벌에 해당하는 계열(系列)과 종업원이 기업의 주인이었던 일본에서도 대형 기업비리사건이 자주 터지고 경영자의 책임문제가 대두되면서부터 주주자본주의가 확산됐다. 노동자와 은행이 기업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강한 독일에서도 우량기업의 실적이 악화하고 국제화가 진전되면서 주주자본주의가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선 더 빠르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것이 그 계기가 됐다.

모범사례는 아직은 많지 않지만 변화태풍은 분명히 오고 있다. 제도개편이 어찌나 빠른지 전문가도 그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달초부터 소액주주들의 ‘끗발’이 훨씬 세어졌다. 회계장부를 열람하고 대표소송을 내 회사측의 부당행위를 견제하고 이사나 감사의 해임을 청구할 수 있는 요건 등이 크게 완화됐다.

미국계 자본이 국내에 많이 들어온 것도 이런 변화를 부채질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경원(金京源)IMF팀장은 “미국계 연기금이나 뮤추얼펀드는 주식투자 수익을 키우기 위해 소송 등을 통한 기업경영 간섭을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영 개입이 활발한 것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교원연금 등은 90년대초 수익성이 나빠진 제너럴모터스(GM)의 사외이사들에게 압력을 가해 회장을 사임시킨 사례까지 있다. 이 연금은 한국 기업 주식도 많이 갖고 있어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사례는 가까이에도 있다. 미국계 타이거펀드 등이 SK텔레콤에 사외이사 선임 등을 요구, 결투(주총)가 벌어지기도 전에 항복선언을 받아낸 것이 바로 그것.

주주자본주의가 번지면 기업경영 관행도 크게 변하게 마련. 주주에게 손해를 끼쳐가면서 부실계열사에 지급보증을 서거나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렵다. 외국계 투자회사들의 견제 때문에 수익성이 불투명한 장기 투자를 하기도 찜찜해진다. 미국에서는 투자회사들 입김때문에 기업들이 지나치게 단기 투자만 하게 된다는 비판론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한국적 기업풍토와 마찰이 예상되는 주주자본주의를 단순히 글로벌스탠더드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야 하나’하는 회의론도 있지만 우리에게 주주자본주의는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박인석(朴仁錫)증권거래소 국제부장은 “주주들에게 경영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거나 주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기업, 주가를 올리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 기업 등은 주식시장에서 자금조달을 하기 어려워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천광암기자〉

▼글로벌스탠더드 취재팀

△홍권희(경제부 차장·팀장) △천광암(경제부 기자) △박현진(경제부 기자) △박래정(정보산업부 기자) △이희성(정보산업부 기자) △이진영(사회부 기자) △유윤종(문화부 기자) △윤경은(생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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