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中 동북3성

  • 입력 1998년 1월 20일 20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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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옌지(延吉)시에 사는 최동현(崔東鉉·80)씨는 1917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옌지시에서 서쪽으로 1.5㎞ 떨어진 워룽(臥龍)동. 조선인들이 주린 배를 움켜 잡고 두만강을 건너 만저우(滿洲)로 넘어와 처음 건설한 마을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일제 패망 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에 공산당에 가입, 혁명에 참여했다. 그후 줄곧 노동자를 상대로 사회주의이념 선전과 의식화작업을 하는 직업동맹에서 일하다 82년 옌볜자치주 직업동맹 책임비서를 끝으로 은퇴해 국가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최씨의 부친은 이른바 ‘15만원사건’을 주도한 항일 독립운동가 최봉설(崔鳳卨·1897∼1973)열사. 최열사는 20년 일제가 만저우의 조선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쓰려고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간도 일본영사관으로 보내던 자금 15만원을 옌볜의 허룽(和龍)현에서 탈취,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그 돈으로 북로군정서에 무기를 공급해주었다. 최열사는 그후 자신을 찾아 연해주로 건너간 부인과 그곳에 정착했으나 37년 우즈베크로 강제이주당했고 그곳에서 농사를 짓다 생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최씨는 어릴적부터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조부모는 가난한 살림인데도 나를 공부시켰고 항상 독립운동가의 아들임을 일깨워 주셨다”고 말했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그의 집안이 중국에 정착한 시기는 1870년 무렵. 당시 함경도에 여러 해 흉년이 되풀이되자 기근을 견디다 못한 그의 증조부가 식솔들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옌볜 땅 어디에도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배지 않은 곳이 없어. 그때만 해도 버려졌던 만저우인 소유의 벌판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일구면서 차츰 뿌리를 내린거여.”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2백만 한인의 이주역사는 이렇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에서 시작됐다. 1860년 청나라는 러시아 등과 베이징(北京)조약을 체결, 러시아에 연해주를 넘겨준 뒤 청조의 발상지인 만저우에 대한 외지인의 출입을 막던 봉금(封禁)조치를 완화했다.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국경지대에 주민들을 정착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자 조선의 헐벗은 농민들은 비옥한 미개척지를 향해 강을 건넜고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 만저우지방에 처음으로 벼농사를 성공시켰다. 한일합병 이전까지 20만명이 중국으로 건너갔고 그 후 농민은 물론 애국지사들의 중국행이 늘어 1930년경에는 60만명을 헤아렸다. 간도에는 창동학교 명동학교 등이 생겨나 민족교육을 담당했고 독립군은 무장 독립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옌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 천수산(千壽山·58)씨는 부모가 모두 연해주 태생. 대대로 함경북도 성진에 살던 그의 집안은 한일합병이 되면서 할아버지 3형제가 연해주로 이주해 살다 다시 중국으로 옮겨 왔다. “러시아에 혁명이 나자 연해주의 조선인 사회도 무척 혼란해져서 안정된 생활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왔대요. 국경수비대에 들킬까봐 밤에 산을 넘고 우수리강을 건너 왔다고 해요.” 일제는 1931년 만저우사변을 일으킨 뒤 이곳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저우개발을 꾀했다. 이에 따라 황무지였던 이곳에 조선 농민의 집단이주를 추진, 38년경 처음으로 간도와 랴오닝(遼寧)성 일대에 조선인들이 이주했다. 간도에서 처음 집단이주가 이뤄진 곳은 안투(安圖)현 창싱(長興)향 신툰(新屯)촌. 이곳에 사는 강영운(姜永云·74)씨의 고향은 경남 합천. 15세 때인 38년 3월 아버지 손에 이끌려 대구역에서 만저우행 열차에 올랐다. ‘만저우에 가면 땅과 집을 주고 소도 준다’는 일제 식민기관인 동양척식회사의 달콤한 꾐에 속아 같이 소작을 하던 이웃 사람 60가구와 함께 고향을 등졌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열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가기를 닷새. 그리고 안투역에 내려 걸어서 꼬박 하루. 거지꼴에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이주민들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키를 웃자란 억새풀 투성이의 황무지뿐이었다. 새 집에 문패까지 달아놨다는 일인들의 당초 선전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해가 진 뒤까지 손이 부르트고 허리가 휘어져라 고생을 하며 땅을 팠지만 토질이 나빠 그해에는 수확을 거의 못했어. 별 수 있나. 숯을 구워 40리나 떨어진 마을에 내다 팔아 겨우 입에 풀칠했지. 이주할 때 농기구다 뭐다 해서 일본회사에 진 빚도 있고 살기도 힘들어 마을사람 가운데 10분의 1이 그 해를 못 넘기고 야반도주했어.” 굵게 파인 주름살과 손 마디마다 박인 굳은 살이 그렇게 땅만 파며 살아온 한서린 일생을 보여준다. 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 중국에 있던 한인은 1백70만명. 이중 70만명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은 해방되자 다시 국공내전에 휘말렸고 도처에서 토비들이 날뛰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부분 가난했던 잔류 한인들은 공산당을 지지, 국민당 정부에 맞서 싸워 신중국 건설에 기여했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한인들의 공헌을 인정해 훗날 옌볜에 조선족 자치주와 대학의 설립을 허용해주었다. 이주민 1세 중 많은 이들이 중국 땅에서 살면서도 언젠가 고향 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살다 숨졌다. 하얼빈의 흑룡강신문사 홍만호(洪滿浩·57)사장은 경북 군위군에 살던 아버지가 35년 중국으로 건너온 뒤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에서 태어난 2세. 그는 “아버지는 목수이면서도 자신이 사는 집은 번듯하게 짓지 않은 채 평생을 사셨다”고 말했다. 홍사장은 “우리 조선족 사회는 그동안 주로 농촌에서 살면서 이러한 조상들의 뜻을 지켜 역경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해 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 부는 개방 바람에 따라 젊은이들이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공동체에 위기감이 돌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동포는 타국의 동포와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만큼 한국 정부와 기업이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을 통해 조선족 공동체 보호육성에 이바지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옌지·하얼빈〓김정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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