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선]日 사이비 지식인들의 망언

  • 입력 1997년 7월 3일 20시 14분


지금 일본 열도는 한 초등학생이 처참하게 살해된 엽기적 사건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살해한 뒤 목을 자르는 등 방법이 말할 수 없이 잔인한데다 범인이 14세짜리 중학생이라는 게 더욱 충격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사건 발생후 TV 신문 주간지 등 각 언론은 범죄심리학자 등 관련분야 전문가들을 등장시켜 연일 특집보도를 해왔다. ▼ 초등생살해 韓人 의심 ▼ 범인이 붙잡힌 요즘은 그토록 잔인한 사건의 발생 배경과 청소년 교육의 문제점은 물론 소년법의 개정 여부까지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는 범인이 누구냐에 대한 추측이 가득한 특집으로 일관했다. 그 무렵 범인은 수사기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지방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다. 의무교육에 대한 거부반응 등 내용은 횡설수설이었다. 그중 「나에게는 국적이 없다. 지금까지 내 이름으로 불려본 적도 없다. 혹시 내가 태어날 때 그대로였다면 자른 목을 일부러 중학교 교문에 놓아두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사회에 대한 도전장」이라며 내용분석을 하는 등 또다시 들끓었다. 이런 와중에 한 민간방송은 정말로 엉뚱한 내용을 그대로 내보냈다. 이 방송의 특집프로에서 한 전직 언론인은 『범인은 일본에 오래 살면서 국적을 취득할 수 없었거나 일본 이름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 민족적 차별에 대해 매우 강하게 호소한 느낌이 든다. 범인의 메시지는 일본인에게 충분히 전달됐다. 그러니 범인은 자수해 재판과정에서 일본인에게 분명히 호소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재일 한국인을 지목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러한 내용의 방송이 나가자 재일동포들은 도쿄에 있는 한국의 각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울분을 터뜨렸다. 『일본의 일부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흉악사건이나 지진 등 참사가 발생하면 이를 외국인, 특히 재일 한국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마치 일본인들은 선(善)의 표상인 것처럼 자신들의 추악함을 은폐하면서 남에게 떠넘기는 자기 망상에 빠져 있다』며 흥분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부 한국 언론은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의 충격을 느끼면서도 「수사가 진행중」인 사건인 점을 감안, 바로 대응하기보다는 일단 수사결과를 지켜보는 등 냉정하게 대처키로 했다. ▼ 맹목적 국수주의 위험 ▼ 이제 범인의 신원은 밝혀졌다. 14세의 일본인 남자 중학생이었다. 외국인의 소행으로 몰던 그들의 악의에 찬 언동은 지금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가. 한 양식있는 일본 언론인은 『분석이 지나쳐도 한참 잘못됐다』며 오히려 자신들이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대신 사과했다. 일본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은 『일본이 경제대국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 내부를 보면 국민의 상당수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등 사회병리 현상에 신음하고 있다』며 일본의 앞날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역사인식은 물론 자기주변에 대한 현실인식조차 없는 일부 맹목적인 국수주의자들에게 기대할 가치는 하나도 없다. 왜곡에 찌든 사이비 지식인들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되는 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은 뻔하다. 그렇게 될 경우 일본의 역할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은 韓日(한일) 두 나라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라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시점이 아닌가. 박기정<동경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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