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67)

  • 입력 1997년 3월 13일 08시 35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22〉 어떻게 보면 그날 한 여자가 찾아온 것은 좀 엉뚱한 일이기는 했다. 『운하 형,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요?』 지하 식당에서 일층 휴게실로 통하는 복도로 걸어 올라오는데 얼굴을 반쯤 가릴 만큼 두꺼운 안경을 쓴 「면제」가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보다 두 살 어린 다른 학교의 사학년 학생이었다. 면제라는 별명도 그가 쓴 안경이 말해주듯 시력이 워낙 나빠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어쩌다 기숙사 야유회라도 가게 되면 커다란 덩치에 씨름을 할 때조차 안경을 쓴 채로 샅바를 잡는 친구였다. 『여기 있지 않으면?』 『기숙사 앞에 누가 형 면회 왔어요』 『면회는 누가?』 『난 못 봤는데 어떤 여자라고 그러는 것 같던데요』 『여자?』 『그렇다니까요.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물어봐요』 처음엔 그 말도 거짓말인 줄 알았다. 사실 그곳에 면회를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시골 가족들은 여간해서 서울로 올라오는 법이 없었고 온다고 해도 사전에 연락을 해 바깥에서 자식을 만나곤 했다. 어쩌다 아들이 머물고 있는 기숙사가 어떤 데인지 둘러보기 위해서 일부러 그곳까지 찾아오는 부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부모들은 정문 밖에서 기다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기숙사 사무실이나 휴게실로 바로 들어오곤 했다. 여자의 면회라는 건 더욱 그랬다. 시설만 그 수준이다 뿐이지 이곳은 사람을 묶어두고 있는 군대 내무반도 아니고, 또 사관학교 기숙사도 아니었다. 일부러 그곳 정문까지 자기가 사귀는 남자를 찾아올 여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한 학기에 한 두 번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 경우도 아주 특별하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때나 있는 일이었다. 그곳에 있다가 연락도 없이 군에 간 애인의 주소를 알고 싶다거나, 혹은 두 사람 사이가 깊을 대로 깊게 사귀다가 남자가 의도적으로 자기를 피한다는 느낌이 들 때 체면 불구하고 그렇게 기숙사로 찾아오는 여자들이 있었다. 물론 여자들은 그 속에 있는 자기가 아는 남자에게 망신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여자들은 기숙사로 찾아와 정문에서 면회를 신청했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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