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대표 내정과정]崔고문입원후 대통령 「결심」굳힌듯

  • 입력 1997년 3월 13일 08시 18분


李會昌(이회창)고문이 신한국당의 새 대표로 내정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엎치락 뒤치락」의 연속이었다. 지난달말 李洪九(이홍구)대표의 경질이 기정사실화된 이후 신한국당과 청와대내에서 물망에 오른 사람은 이고문을 비롯, 李漢東(이한동) 崔炯佑(최형우) 金命潤(김명윤) 李萬燮(이만섭) 李壽成(이수성)고문과 金宗鎬(김종호) 徐錫宰(서석재)의원 등 부지기수였다. 이중 가장 유력시되던 인물은 이한동고문이었다. 이른바 「대안부재론」에 따른 관측이었다. 당운영을 힘있는 실세 대표에게 맡겨 난국극복의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논거였으나 그 중요한 배경은 한보사태로 치명적 상처를 입은 민주계배제론이었다. 하지만 이한동고문을 둘러싸고 「대선주자가 대표를 맡는 것이 온당하냐」는 회의론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꼬였다. 「된다」느니 「안된다」느니 엎치락 뒤치락을 거듭한 끝에 지난 6일 姜仁燮(강인섭)대통령정무수석이 『경선출마포기가 대표기용의 전제조건이 아니다』는 발언을 해 이한동고문 쪽으로 가닥이 잡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대선주자들이 강하게 반발을 보이면서 분위기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강수석은 8일 『총재가 직접 경선출마 포기를 종용할 수는 없으나 후보의사를 가진 분은 자기판단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출마포기가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의 「희망사항」임을 암시했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이한동고문이 거듭 경선출마의 뜻을 시사하자 김대통령의 의중은 한때 최형우고문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고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직후부터(11일 오전) 청와대쪽에서 나오는 얘기의 기조가 달라졌다. 고위관계자들의 입에서 『경선출마포기를 새 대표의 전제조건으로 단 적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이는 결국 이회창고문으로 결론이 났음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12일 밤늦게까지도 이한동 이수성고문 김종호의원 내정설 등이 난무하는 등 혼선을 빚었다. 〈이동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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