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판매 10만권 돌파 소설 「혼불」작가 최명희씨

  • 입력 1997년 1월 5일 20시 05분


「鄭恩玲 기자」 새해 서점가에 대하소설 「혼불」(한길사 간)이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전반적인 책시장의 불황속에서도 「혼불」은 서점에 나온지 보름만에 초판 10만권(1만질)이 모두 팔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출판관계자들은 「혼불」의 인기가 최근의 얼어붙은 출판풍토에 비추어 「이상난동현상」이나 다름없다고 입을 모은다. 일제 치하 전라도 남원땅 양반가문의 몰락과정을 그린 10권짜리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도 『남녀가 만나 옷고름 한번 제대로 푸는 일이 없다』고 말할 만큼 말초적인 재미와 거리가 먼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으로 「혼불」 제1부를 탄생시킨 이후 17년간 묵묵히 「혼불」 한 작품에만 매달려왔던 작가 최명희씨(50)는 독자들의 열띤 반응에 대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라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인다. 『경제발전이나 현대화의 회오리속에서 우리 삶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차츰 실종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혼불」속에서는 작품의 줄거리 못지않게 본관이나 택호 세시풍속같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 전통적 삶의 원형을 복원해내려 했지요. 저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독자들이 많은가 봅니다』 「내 정신과 몸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최씨에게는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홉살 때 아버지와 함께 본가가 있는 남원으로 추석차례를 지내러 가던 길이었다. 때마침 비가 와서 온통 진흙탕길이라 어린 최씨가 『무슨 길이 이래』라고 투정을 부리자 젊은 아버지는 손을 쳐들어 고향의 산과 들을 가리키며 어린 딸을 엄하게 꾸짖었다. 『이 동네가 얼마나 좋은 곳인데, 이 길로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다니셨다. 온 조선 강토를 다 다녀도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외가의 어른들은 어린 최씨를 무릎에 앉혀놓고 몇대조 선조의 얘기까지 마치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인양 생생하게 들려주곤 했다. 당시 어른들이 들려준 것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섬기던 왕조가 망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언젠가는 밝은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제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밝힌 「큰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혼불」속에서 가문을 지키기 위해 거센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청암부인이나 종손부 효원은 어린 시절 최씨가 들었던 꿋꿋한 조상님들의 혼이 살과 피를 얻어 새로 태어난 모습이다. 최씨는 「혼불」을 쓰며 17년간 원고 한줄을 보탤 때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듯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왔다. 판소리용어를 빌리자면 소설속의 활자들이 눈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운율을 타고 가슴에 척 안겨드는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사자료는 「혼불」이 아니라도 도서관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역사의 느낌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박제돼 있는 선조들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어 오늘의 내 삶과 한 탯줄로 잇기 위해서는 어머니 할머니의 목소리를 그대로 「혼불」안에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씨는 「혼불」이 젊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것이 무엇보다 고마운 일이라고 말한다. 어린 자식을 둔 한 30대 초반의 가장이 보내온 독후감은 특히 잊혀지지 않는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거미처럼 전통적인 가치관과는 실낱처럼 연결돼 있고 그 실낱을 끊고 땅으로 내려서자니 신세대다, X세대다 하는 세태가 내것이 아니어서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혼불」을 읽고나서 비로소 내가 발딛고 서야할 곳을 찾게 됐다…」. 『새해 벽두부터 많은 사람들이 세기말의 혼돈을 얘기하고 어두운 우리 사회 현실에 몸서리를 칩니다. 하지만 타락에의 심연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고결하고자 하는 사람의 염원은 그보다 더 크고 강렬해지는 법입니다. 부디 「혼불」이 자신의 삶을 끌어올리고자 하는 많은 분들에게 맑디 맑은 샘물같은 격려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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