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97 선진정치/깨끗한 선거]역대 부정선거

입력 1997-01-05 20:05수정 2009-09-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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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哲熙 기자」 지난 48년 정부수립이후 여덟차례 실시된 국민직선의 대통령선거는 예외없이 관권동원 금품살포 흑색선전 투개표부정 폭력조장 등 온갖 불법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물론 패자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다반사로 선거무효소송이 제기됐고 심지어 정권타도투쟁으로 이어진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마구잡이식」 행태의 불법 부정이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은 李承晩(이승만)정권시절부터였다. 당시 군수나 경찰서장은 으레 통반장을 동원,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했고 막걸리 한잔이나 고무신 한켤레에 표를 사고 파는 매표행위도 성행했다. 뿐만아니라 민족자결단 백골단 딱벌떼 등 폭력단들이 공공연히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가 하면 곳곳에서 투개표 중단사태가 잇따랐다. 급기야 △4할사전투표 △3인조 9인조투표 △참관인매수 등 온갖 해괴한 부정수법이 총동원된 4대 대선(3.15부정선거)은 4.19 혁명을 불렀고 이승만정권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5.16 이후의 朴正熙(박정희)정권 때도 기법이 다소 「지능적」으로 바뀌었을 뿐 선거부정은 여전했다. 국무위원들의 노골적인 선거지원, 통반장들의 공공연한 선거운동, 부녀자들의 야유회 술판, 선심공세, 경찰의 비호아래 돈봉투돌리기 등 이승만정권시절을 뺨칠 정도였다.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세계 유일의 독립된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족됐지만 허울에 불과했다. 야성유권자의 누락, 친여유권자의 이중등재, 부재자투표부정 등 투개표관리조차 공정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릴레이투표」라는 신종수법이 등장한 것도, 중앙정보부와 국세청 등을 동원한 야당세력 탄압이 극성을 부린 것도 박정권 때였다. 또 71년 대선 때는 金大中(김대중)신민당후보의 동교동 집 마당에서 폭발물이 터지는가 하면 鄭一亨(정일형)선거대책본부장 집에서는 화재가 발생, 선거관련서류가 모두 소실되는 등 테러까지 판을 쳤다. 지난 87년의 대선도 금권 관권선거로 얼룩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초반부터 분위기가 과열, 전국의 유세장에서 난투극이 벌어지는 등 폭력이 난무했고 구로구청에서는 봉인이 뜯긴 투표함이 발견돼 경찰의 농성시민 진압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야기되기도 했다. 92년 대선은 과거에 비해 비교적 평온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관권 금권선거 풍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투표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검경이 전국연합과 현대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실시, 야당탄압 시비를 낳는가하면 며칠 뒤 부산에서는 관계기관장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이른바 「초원복국집사건」까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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