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동아신춘문예/시나리오부문]당선소감 및 심사평

  • 입력 1997년 1월 2일 20시 02분


▼당 선 소 감 ▼ 1993년에 첫 장편소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를 출간한 뒤에 많은 독자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 중에서 소설의 「허구」를 「현실」로 믿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 시나리오를 쓰게 된 동기였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인 오연정이 사는 집의 전화번호를 설정할 때는 별 생각 없이 오빠 집 번호를 썼었다. 그런데 소설이 출간 된 뒤에 그 번호로 수많은 전화가 걸려 왔다. 그들은 모두 너무나도 간절하게 「의사소통할 세계를 상실한 뒤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만의 밀실」로 도피한 고독한 여인 오연정과의 만남을 원했다. 「환상을 믿는 순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든 시나리오에 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구상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나고도 나는 그 시나리오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아직 어린 두 아이에게 이유식과 간식을 만들어 먹이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놀이터에 가서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하루 해가 짧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만을 위해 쓸 시간의 부재는 때로 나의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렸고, 그 때마다 나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런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여름의 끝에서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했다. 공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주인공들에게 부여할 대사와 일화들을 메모해 뒀다가 아이들을 재운 뒤에 서재로 건너와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이들이 깨어 울면 얼른 아이들 방으로 가 노래를 불러 재우고….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 정형외과에 다니면서, 때로는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주지 못하면서 쓴 작품이었기에 당선 통지는 더없이 큰 기쁨이었다. <양 선 희> △60년 경남 함양 출생 △84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 △87년 「문학과 비평」 시로 데뷔 ▼ 심 사 평 ▼ 작년에 비해 전체적으로 응모작품들의 수준이 눈에 띄게 좋아진데다 작품의 소재와 주제 또한 다양해진 편이었다. 가벼운 섹스 코미디, 또는 액션물이 주류를 이루는 영화 현장의 흐름과 달리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은 것도 유념할 대목이었다. 이상인의 「달구지別曲」은 자동차 중개상 주변의 인물들과 살아가는 모습이 나름대로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그려져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을 단숨에 끌고 가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로 만들어지기보다는 TV드라마의 대본으로 더 어울릴 성 싶다. 양종현의 「삼촌의 새벽」은 한 월남가족이 현대사의 격동기를 거치며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린 가족사인데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발견해내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보는 이의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진실함이 있다. 그러나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지기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평면적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80년대 초 서울근교의 어느 소읍을 무대로 정치권력의 변화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원종훈의 「54년형 제무씨, 라디오, 누렁다리가 있던 마을」역시 평면적이고 소박하기만 해서 일상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를 끌어내는데 실패하고 있다. 정진규의 「카오스에서의 정거」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러나 장자(莊子) 이래 프로이트와 보르헤스까지의 인간과 꿈이라는 그 중요한 화두를 살인사건이란 지극히 세속적인 시각으로 다룸으로써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말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양선희의 「집으로 가는 길」은 젊은 두 남녀가 사랑이란 집을 찾아가는 짧고도 긴 노정을 그리고 있다. 뛰어난 영화적 상상력으로 한편의 영상시를 만들어낸, 작지만 울림이 큰 작품이다. 사랑을 믿는 영혼에게 박수를.<이 창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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