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동아신춘문예/중편소설 당선작]「달에게」…박자경

  • 입력 1997년 1월 2일 20시 02분


▼ 줄 거 리 ▼ 나는 하루 종일 빈 들이나 쳐다보며 사는 여자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칩거하다시피 한 생활에 만족하지만 차츰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허망히 느낀다. 그런 하루, 회사 동료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경쟁사의 정보선을 좀 대 달라는 용건이다. 나는 그토록 지긋지긋해 했던 회사를 떠올리며 역시 잘 떠나왔다고 생각한다. 노을지는 들을 바라보다 아이를 불러들이기 위해 나선 해거름에 한 여자를 만난다. 얼굴은 아는데 어쩐지 영혼은 생소한 존재다. 그녀의 실재를 믿을 수 없어 하던 나는 문득 깨닫는다. 대학동창인 그녀를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자살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며 텅 빈 거리의 노점수레나 망원경으로 끌어당겨 보다 잠깐 남편 생각을 한다. 전원주택지 운운하며 땅을 보겠다고 어제 아침 불쑥 집을 나간 남편은 늘 그렇듯이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낙오하고 만 사회생활도 그는 별 갈등없이 잘 하는 사람이다. 밤마다 버릇이 되고 만 전화 걸기를 하려고 수첩을 들었다가 해거름에 만난 친구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녀, 미란에게는 전화할 수가 없다. 오랜만에 전화했다가 비감스러운 봉변을 당한 적이 있어서다. 전화 걸기도 그만두고 사실 관심도 없는 텔레비전 뉴스를 틀었다가 전직 대통령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는 괜히 허둥댄다. 차를 쏟고 주전자에 불이 붙는 환영을 보기도 한다. 미란이 자살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 떠올라서다. 기억 속의 방 하나가 떠오른다. 그 방 얻는 일을 미란에게 부탁했었다. 그러나 방을 얻지 못하고 그 날 미란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미란이 인간의 모든 개혁 의지를 부정하는 말을 한다. 학생운동에 쫓아다니느라 놓치고 만 학업으로 모든 취직 길이 막힌 미란이 이상한 종교에 미혹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미란에게 막 살지 말라는 말을 한다. 그 후 나는 방을 구한다. 그 방은 내가, 언제나 분실할까 봐 염려하던 나의 애인과 그의 조직의 아지트였다. 나는 그 방이 보통 살림집처럼 보이도록 비어 있는 동안 그 방에서 살아야 했다. 그때, 절대의 적빈과 불안 속에 혼자 있는 나를 찾아와 준 사람이 있었다. 내 어둠 속에 달처럼 떠올랐던 존재, 진주라는 후배였다. 연탄 한 장을 못 사 온통 곰팡이에 점령당한 방에서 우리는 함께 쪼그리고 앉아 식빵으로 연명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그 방에 얽힌 모든 기억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을 때 그녀는 시위에 쫓아다니느라 졸업정원제에 걸려 졸업도 못하고 성인 오락실 캐셔로 취직하거나 이민을 가버리겠다는 등, 종전의 그녀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탈을 보였다. 우리는 그녀의 이민 문제로 싸우다 서로의 서러움으로 길거리에서 운다. 나는 취직 자리를 소개시켜 주기 위해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가 미란으로부터 방 얻어달랬던 일을 두고 자기를 이용해 먹었다는 격렬한 항의를 들은 것이었다. 그 후 진주는 학사고시를 통과했고 나는 당연히 그녀가 잘 살 거라고 믿고 있을 때 길에서 우연히 진주를 본다. 허나 바빠서 아는 체를 못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진주가 이민을 갔음을 알게 된다. 자기의 신념을 부정하고 떠난 진주가 미워 나는 진주와 미란이니 하는 그 방에 얽힌 모든 기억을 지운다. 후에 미란을 다시 만났지만 우리는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미란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믿게 되었다. 그녀는 자살했을 거라고. 연락이 없던 남편에게서 이른 아침 전화가 온다. 남편은 무슨 천상의 유배지 같은 곳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전화하는 것만 같다. 더구나 그는 의붓아비 집에 실은 자기도 잠깐 살았는데 아비는 미웠지만 바다만큼은 인상적이었던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전화를 끊고나서야 나는 남편이 심상치 않음을 안다. 그리고 집안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무선호출기에 녹음된 친구의 메시지를 통해 시국사건에 연루된 뒤로 정신 이상을 보이던 친구가 끝내 자살했다는 부음을 남편이 받았음을 안다. 나는 남편의 바닷가를 찾아간다. 남편은 잊었겠지만 그는 언젠가 술이 억병으로 취한 날 자기의 그 바닷가를 고백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서도 남편은 찾을 수 없다. 나는 숙소에 짐을 풀고 바닷가에 나와 남편을 기다린다. 그러나 해가 지고 달이 오르도록 남편은 나타나지 않는다. 남편을 더 기다릴 요량으로 아이에게 달이 지는 광경을 보여주마고 한다. 내가 찾아야할 얼굴들, 잊었던 얼굴들을 그리는 심정으로 나는 달을 바라본다. 바다에 달 빠지는 광경을 상상하며 있을 때다. 달이 점차 붉어지더니 수평선에 이르기도 전에 하늘에서 녹아 사라지고 만다. 나는 가슴이 무너진다. 잘나지도 모질지도 못한 우리들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아서다. 사위어가는 불꽃에 쓰레기를 던져 넣으며 나는 내 머리가 기억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던 사실을 떠올린다. 더는 불행이 없을 것 같아서 찾아간 진주의 낙원에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났던 사실. 내일 다시 남편을 찾아 보리라 생각하며 숙소를 향해 잠든 아이를 업고 오르는데 숙소에 불이 켜진 것 같다. 남편이 있는 것 같다. 불꽃에 타다 만 몸으로 괴로워하며 죽어갈까봐 그토록 애태우던 그 사람이 있는 것만 같다. 달도 없는 밤, 환각일 것만 같은 불빛을 향해 나는 허위허위 길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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