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01)

  • 입력 1996년 10월 31일 20시 25분


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8〉 현석은 변함이 없다. 변함없이 이기적이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 타고난 성격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피곤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나는 엄청나게 피곤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마치 물웅덩이 같았다. 물살이 빙빙 돌기만 할 뿐 한 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일어선 것은 결국 내 쪽이다. 『오늘 반가웠어요. 다음에 또 연락하죠』 하면서 탁자 구석에 뒤집혀 놓여진 영수증으로 손을 뻗는 내 몸짓은 조금 냉정하다. 그런데 현석도 그 영수증을 집어들려던 참이었다. 탁자 위에서 우리의 손끝이 닿는다. 갑자기 현석이 내 손을 움켜 잡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성큼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가는 그의 손안에는 영수증만 쥐어져 있을 뿐이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다. 먼저 계단을 내려온 나는 어둠 속에서 잎이 지기 시작하는 나무를 묵묵히 쳐다본다. 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빨리 집에 돌아가서 재회의 실패를 마음껏 슬퍼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내일, 아니 오늘 당장 수첩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네번째 줄에 적혀 있는 이름의 남자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짓을 하는 데에 어떤 고귀한 망설임이 필요할 것인가. 현석은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화장실에 들르는 모양이다. 나는 발끝으로 계단 모서리를 툭툭 치며 그를 기다린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심상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머리를 한번 뒤로 젖힌다. 그러나 현석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웬일인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고 싶어진다. 그의 머리카락이 젖어서 이마 위로 흘러 내려와 있다. 그리고 비누냄새가 난다. 그의 뺨과 이마와 입술이 익숙한 감촉의 기억을 갖고 내 눈속으로 스며든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현석은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머리가 아파서 세수 좀 했어요』 그런 다음 내 눈앞으로 얼굴을 바짝 가져오며 이렇게 말한다. 『저녁 먹고 가요. 괜찮죠?』 비누냄새가 훅 끼치는 것과 함께 그의 입가에 씨익 웃음이 번지는 것이, 내게는 마치 나뭇잎 한 잎이 얼굴 위에 떨어지듯 간지럽고 아련하다. <글 :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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