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침 새지평]신랑 신부는 소품?

  • 입력 1996년 10월 29일 20시 27분


10월엔 유난히 결혼식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고궁 공원 유원지 어디서나 신랑 신부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카메라 앞에서 행복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 두번 볼 때는 전염되던 행복감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왠지 끔찍했다. 감독은 카메라맨, 출연배우는 신랑 신부. 똑같은 포즈에 똑같은 표정을 연출하고 있는 화사한 신랑 신부들이 지겹기까지 했다. 그 일사천리한 작품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돈은 또 얼마나 될까. ▼ 돈에 물든 결혼식 절차 ▼ 돈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 후배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돈이 드는 결혼식을 못한 거였다. 그 후배는 결혼신고만 했고 『돈이 없어 결혼은 나중에 한다』고 했다. 월세방에 최소한의 살림도구만 장만했다. 사실 그게 결혼이 아닐까. 거기에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친지들만 불러 모아 간단하게 부부의 연을 축복받으면 그게 완벽한 결혼이지. 사실 나는 결혼식을 하는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야 하고 왜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야 하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살기로 결단하는 그 날, 왜 그 남자와 그 여자가 한번 본 일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봉투를 내밀고 이름을 적기 위해 시장같은 결혼식장에 나타나야 할까. 왜 우리들은 방명록을 보기 전엔 누가 왔다 갔는지도 알 수 없는 북적대는 결혼식일수록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할까. 일대의 교통을 완전 마비상태로 몰아갈 정도로 하객을 불러모으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존경받을 때 분명히 부부의 연으로 살아가면서도 결혼을 하지 못했다고 자조해야 하는 억울한 사람들이 생긴다. 풀풀나는 돈냄새에 위압적인 절차만이 남고 정작 신랑 신부들이 「소품」인 결혼식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전 내 남동생이 결혼을 했다. 아직까지도 우리의 결혼문화 속에선 여자가 약자였다. 여자와 남자가 사랑해서 결혼을 하는데 왜 여자는 남자 집안의 어른들께 바쳐야 하는 물품들이 그렇게 많은지. 이름하여 혼수문제였다. 혼수는 성격상 웬만큼 잘 해서는 잘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치는 공물이기 때문이다. 강자인 남자 집안은 그것으로 약자인 여자 집안에서 자신의 아들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려든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이 해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이 혼수다. 사실 혼수는 받는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단순히 옷 한벌 아닌가. 그러나 격식을 갖춰 준비해야 하는 사람에겐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다. 더군다나 혼수가 품위 운운하는 장사꾼의 잇속에서 놀아날 때 혼수 준비가 안돼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웃기는 얘기는 심각한 얘기가 된다. ▼ 「악순환의 고리」 끊어야 ▼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선 여자 집안이 그 얘기를 꺼내기는 어렵다. 남자 집안에서 누군가가 해줘야 한다. 나는 주변을 설득했다. 미래의 올케가 혼수를 해 올 필요가 없다고. 어렵게 어머니를 설득하고 고모들을 설득했다. 그 다음엔 결혼식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돈을 걷는 일도 폐습이라고 주장했다. 고지서 발부하듯 인쇄된 것이 아니라 정성껏 손으로 결혼초대장을 내고 싶은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이면 결혼식에 초대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고. 그러나 여태껏 「결혼시장」을 돌며 뿌린 것이 많은 부모들은 내 의견을 웃으면서 무시했다. 누군가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할텐데. 李 柱 香 <수원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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