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87)

  • 입력 1996년 10월 17일 10시 53분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기 〈35〉 나는 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이 쪽에서 보더라도 우리같은 부모를 원치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런 관계는 아예 생겨나지 않도록 막아버려야 하는 것이었 다. 그런데도 나는 쉽게 중절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 설명할 순 없지만 내 몸속에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나는 뜻밖에도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상현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아이와 헤어져야 할지 아닐지 결정한 다음에 말할 생 각이었다. 어차피 그 아이가 편모슬하에서 자라리라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으므로 그 의 의견보다 내 결정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아이를 철저히 나만의 아이로 생각하다니, 상현의 몸에 대한 혐오감에 넌더리를 치긴 했어도 모성이란 원초적인 본능인 모양이었다. 여자로서의 본능이 다분히 사회적이라면 어머니로서의 본능은 그보다 훨씬 원초적이었다. 그 무렵 상현의 새로운 관심사는 인도였다. 인사동 술집에서 우연찮게 합석을 했 다는, 반은 스님이고 반은 처사인 한 남자를 통해서 인도를 알게 된 상현은 완전히 마음을 뺏겨 있었다. 그 남자는 외국서적을 취급하는 조그만 책방 주인이었는데 불 경이나 중국 인도 책을 구해온다는 구실로 일 년에 두세 번씩 대만을 거쳐 인도에 가서 몇 주일씩 머물다 오는 사람이었다. 상현은 그 남자를 따라 인도에 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별렀다. 그 가 인도에 갈 만한 목돈을 마련하지 못하리란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인 도 이야기 역시 얼마 안 가 숙어들어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새로운 일에 빠져들고 순간적 열정에 휘둘려 자기 삶을 방치하는 상현 에게는 인도란 쉽게 떨칠 수 없는 강렬한 매혹이었다. 어느날 그는 전세금을 빼달라 고 말했다. 인도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 그의 말투는 상당히 초탈했다. 아내야 어찌 됐든 자기 혼자 전세금을 빼서 인도 여행을 가겠다는 뻔뻔스러운 용건이 아니라 마치 아주 많 은 재산을 아내에게 다 넘기고 홀연히 도를 닦으러 떠나는 것 같았다. 『소유란 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중요한 건 정신의 터야. 육신의 집을 지니면 뭐하겠어. 너도 그런 생각으로 좀 초연하게 살아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글 :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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